부산 문예인의 아지트 부산포식당의 편액에는 ‘그냥 갈 수 없잖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편액이 걸린 장소를 생각하면 한 잔 술을 나누자는 직접적인 표현 같지만, 그 안에는 나라를 찾아야 가지 그냥 못 간다, 빼앗긴 조국을 반드시 되찾겠다는 독립군의 기상이 담겨 있다.
이 글귀는 중국 관내에서 예술구국활동으로 한국 독립운동의 사기를 드높였던 독립운동가 한형석(韓亨錫·1910~1996)이 직접 쓴 것이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예술부장,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을 지내고 한·미 합동 OSS 특수공작훈련을 받기도 한 독립유공자, 음악가 겸 문화운동가다. 그는 중국에서 일본 제국주의 감시를 피해 항일예술활동을 할 당시 ‘한국을 생각하며 그리워하다’라는 뜻의 한유한(韓悠韓)이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여, 한동안 그의 업적은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올해는 한국독립군 창립 80주년이자, 한형석 탄생 110주년이 되는 해이다. 저자는 2006년 부산근대역사관에서 근무할 때 한형석 선생 서거 10주년 기념 특별전 ‘대륙에 울려 퍼진 항일정신-먼구름 한형석의 생애와 독립운동’을 기획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평전을 집필하게 됐다. 한국에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립운동가로서의 한형석의 활동과 아버지 한형석의 면모까지 꼼꼼히 전한다.
책에 따르면 부친 한흥교의 뒤를 따라 항일운동에 투신할 방법을 고민하던 한형석은 1929년 노하고급중학교를 졸업한 후에 부친의 친구이자,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인 조성환의 조언으로 상하이 신화예술대학에 진학한다.
한형석은 중학교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예술적 재능을 조국 광복을 위한 민족적 단결에 쓰겠다는 자신의 투쟁 노선을 정한다. 이것이 ‘예술구국운동가 한유한’의 탄생 배경이다. 한형석이 한국독립군으로 참여할 당시는 중일전쟁 발발로 중국에서 활동하는 한국독립운동세력에 새로운 변화가 요구되던 시기로, 전면적인 대일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한인무장역량을 집중시켜야 했다. 이에 조선의용대,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한국청년전지공작대, 한국광복군이 차례로 창설됐다.
한형석은 당시 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으로 한인무장역량을 집중·고취시키기 위해 중국 관내에서 적극적인 항일예술활동을 펼쳤다. 이런 활동들로 ‘신혁명군가’, ‘승리무곡’,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등을 창작해 궁핍하고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대원들이 지치지 않도록 사기를 드높여서 한인 무장의 결속력을 강화시켰다. 1940년 5월 15일 중국 시안에서 초연한 항일가극 ‘아리랑’은 당시 현지에서 발행되던 신문지면에 연일 보도돼 주목을 받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