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의 마지막 주말 제주도의 한 인문학 서점에 강연을 다녀왔다. 김포공항을 뜬 여객기는 한 시간도 안 되어 제주공항에 착륙한다. 여객기가 내륙을 가로질러 상공을 날아가는 동안 불현듯 제주도와 이어진 나의 ‘과거’를 소환한다. 기억의 갈피에 묻은 제주도라니, 한 줄기 감회가 없을 수 없다.
1980년 여름, 출판사 직원으로 밥벌이를 할 때 서울에서 제주도로 이주한 한 작가의 소설을 받으러 입도(入島)했다. 2주 동안 있었지만 작가에게 원고를 받지 못한 채 빈손으로 서울로 올라왔다. 한창 낙양의 지가를 올리던 작가에게 거액을 쥐어주고 전속계약을 한 것은 내 제안이었다. 허탈한 심경으로 제주도를 떠났는데, 내 무능에 책임을 지기로 했다. 서울에 올라와서 퇴직과 출판사 창업 의사를 밝힌 뒤 사표를 냈다. 출판사 사장이 ‘이 어려운 때에 창업은 어리석은 결정이다’라고 극구 말렸지만 내 결심은 굳었다. 퇴직금을 받아 손바닥만 한 사무실을 얻고 출판사 창업을 했다. 그 출판사를 13년 동안 경영하며 여러 책을 기획하고 펴냈다.
한 필화 사건으로 1992년 10월 29일 전격 구속되어 구치소에 있다가 그해 12월 30일에 풀려났다. 막막했다. 이듬해 1월 3일인가, 세면도구만을 챙겨 다시 제주도에 내려왔다. 서귀포에 사는 지인 K의 집에서 머물면서 마음 정리를 했다. 일제강점기 때 전분공장을 하다가 해방 뒤엔 권투도장으로 쓰던 고모의 집을 K가 관리하는 중이었다. K는 별채에 딸린 방 한 칸을 무상으로 내어주었다. 마당 끝자락은 벼랑이고, 벼랑 너머는 망망대해였다. 한밤중 오줌 누러 나왔다가 먼 바다의 배들이 밤샘 조업을 하느라 불을 밝힌 채 떠 있는 광경을 바라보곤 했다. K는 제법 알려진 노래도 두어 곡이 있었지만 무명이나 다를 바 없는 작곡가였다. 그 무렵엔 아내와 어린 딸을 두고 일없이 빈둥거리며 지냈다. 밤엔 기타를 연주하며 제가 만든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며 변방에 눌러앉은 자의 평온함과 슬픔을 동시에 느꼈다. 그의 작곡 노트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한 아름다운 수백 곡이 빼곡하게 들어 있었다.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