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 ‘동양극장 2020’
일제강점기에 민족자본으로 세워진 우리나라 첫 연극 전용 극장이 있었으니 ‘동양극장’이다. 연극 시작은 징을 쳐서 알렸다는데 무대 밑에선 스팀 효과를 낼 수 있었고 회전무대가 멋들어진 당시로서는 최첨단 극장이었다. ‘청춘좌’와 ‘호화선’이라는 양대 전속극단을 통해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검사와 여선생’ 등 여러 흥행작을 배출한 이 왕년의 무대가 다시 열렸다.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작업을 펼쳐 온 국립극단이 지난 10일부터 사흘간 옛 동양극장 히트작 두 편과 짧은 막간극을 ‘동양극장 2020’으로 새롭게 만들어 온라인으로 공개한 덕분이다.
첫 작품은 시인 김기림의 희곡 ‘천국에서 왔다는 사나이(사진)’. 생활고에 시달려 천국행을 택했으나 “천국은 만원이니 돌아가라”는 천국 문지기 강권과 허약한 신에 실망해 다시 이승으로 돌아온 남자가 벌이는 블랙코미디가 쓴웃음을 만들어낸다.
◆LG아트센터 연극 ‘오네긴’
선구안 좋은 기획력으로 수준 높은 공연예술을 국내 소개해 온 LG아트센터에 올 한 해는 가혹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예술가들의 국가 간 이동이 어려워지면서 힘들게 준비했던 기획 공연이 줄줄이 취소됐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LG아트센터가 훗날을 위해 씨앗 심듯 시작한 프로젝트가 온라인 중계다. 그간 인연 쌓은 해외 유명 예술가·예술단체 작품을 랜선중계하는 것으로 닫힌 극장 문을 바라보던 공연 팬들의 아쉬움을 달래줬다.
지난 11, 12일 네이버TV를 통해 랜선중계된 러시아 스타 연출가 티모페이 쿨랴빈의 연극 ‘오네긴(사진)’도 그런 작품 중 하나다. 코로나19가 없었다면 지난달 내한 공연이 열렸을 텐데 대신 2014년 러시아 레드 토치 극장 공연실황이 소개됐다.
시베리아 중남부 노보시비르스크 주립 레드 토치 극장을 이끄는 쿨랴빈은 현재 유럽 연극·오페라계가 가장 주목하는 신예 연출가. 독창적 해석을 통해 평단과 관객 호평을 받고 있다. 이번에 소개된 ‘오네긴’ 역시 러시아 대문호 푸시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시킨 작품이었다.
1, 2막을 합쳐 공연시간은 2시간 20분에 달하는데 내레이션 비중이 컸다. 주인공 오네긴의 권태, 오만, 갈등을 마치 시 같은 독백으로 관객에게 전달했다. 줄거리는 화려한 도시 사교계 생활에 질린 젊은 귀족 오네긴이 시골에서 만난 여인 타티아나와 그녀의 여동생 올가, 그리고 연인 렌스키의 삶을 뒤흔든다는 원작 그대로다. 숱한 드라마, 영화, 그리고 발레로 만들어진 원작을 이 젊은 연출가는 오네긴 내면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으로 새롭게 만들었다. 초반 20여분을 춤과 술, 여인에 빠진 오네긴의 권태로운 삶을 반복적으로 묘사하는 데 할애했을 정도다. 보는 이도 권태를 느낄 정도였던 무대는 오네긴이 삼촌 유산을 물려받기 위해 내려온 시골에서 렌스키와 우정을 맺으며 활기를 띤다.
쿨랴빈 연출력이 잘 드러나는 대목은 오네긴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난 타티아나의 변모 과정이다. 통과의례를 거쳐 극 초반 오네긴처럼 능숙하게 춤을 추는 도시의 사교계 꽃으로 피어난다. 작품 피날레는 원작 그대로 오네긴 구애를 타티아나가 거절하는 장면인데 쿨랴빈은 두 엇갈린 남녀가 강렬한 시선을 주고받은 후 타티아나가 거침없이 자리를 뜨도록 연출했다. 오네긴은 바람 앞에 내면이 다 떠내려간 공허한 존재로 홀로 어둠 속에 남겨진다. 극 초반 쿨랴빈이 자주 떠먹는 건 캐비어. 온라인 중계가 아니었다면 미처 몰랐을 디테일이다. 다만 공연 내내 화면 상단을 장식하는 LG아트센터와 네이버 로고는 감상을 방해한다.
◆한화클래식 2020
“집에서 이렇게 편하게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다니 감사합니다.”
“집에서 듣는 라이브가 이렇게 몰입감이 있다니 상상도 못 했네요.”
“공연장보다 좋은 점도 있네요 지휘자의 감정담긴 모습을 저렇게 볼 수 있다니~~”
코로나19가 만들어낸 온라인 공연 시대에 우리나라 클래식도 적응할 수 있을까. 12일 오후 5시부터 80분가량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랜선으로 안방에 실시간 중계된 ‘한화클래식 2020: 소프라노 임선혜와 바로크 프로젝트(사진)’가 그 정답을 보여줬다. 공연 당일 시청자 수는 1만1000여명을 기록했으며 중계 도중 받은 ‘좋아요’는 6만4000여개, 실시간 시청 소감을 담은 댓글은 1100여개에 달했다. ‘바로크 음악’이라는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덜 대중적인 주제로 진행된 연주회였음을 감안하면 ‘흥행 초대박’인 셈이다.
올해로 8회째를 맞는 한화클래식은 그간 고음악 분야에서 쟁쟁한 해외 연주자들을 국내 소개해왔다. 윌리엄 크리스티(레자르 플로리상), 조르디 사발, 안드레아스 숄, 잉글리시 콘서트, 마크 민코프스키 등이 한화클래식을 통해 국내 무대에 설 수 있었다. 올해도 고음악에서 손꼽히는 해외 아티스트가 내한공연할 예정이었지만 코로나19로 상황이 바뀌었다. 해외 연주자 내한이 어려워지면서 대신 고음악 무대에서 활동해 온 우리나라 연주자들이 무대에 설 기회를 얻게 됐다. 그 결과 윌리엄 크리스티의 레자르 플로리상에서 활동해 온 바로크 바이올리니스트 김나연을 악장으로 세워 실력 있는 고음악 전문 연주자들로 새롭게 구성한 한화 바로크 프로젝트 앙상블이 이날 고음악의 진가를 선보였다.
리코더로 고음악에 입문한 후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유럽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차세대 지휘자 권민석이 지휘한 이날 무대에선 바흐의 관현악 모음곡 2번,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4번이 연주됐다. 하이라이트는 데뷔 20주년을 맞은 소프라노 임선혜가 부른 칸타타 ‘이제 사라져라, 슬픔의 그림자여’. 이미 여러 연주회에서 바로크 음악이 지닌 매력을 보여준 바 있는 이 세계적 소프라노는 바흐의 세속 칸타타 중에서도 특히 널리 사랑받는 아름다운 작품을 마음껏 부른 후 “봐주셔서 감사합니다”고 카메라를 향해 인사했다.
한화클래식2020은 16일에도 온라인 실황 공연을 펼치는데 페르골레지의 짧고 유쾌한 콘서트 오페라 ‘마님이 된 하녀’를 임선혜와 2019년 차이콥스키 콩쿠르 남자성악 부문 2위를 차지한 김기훈이 노래할 예정이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