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지배하던 오스트리아가 무너진 이유 "국민적 동의 없는 일방적 통치 정책의 실패"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 김장수/ 푸른 사상/ 2만2000원

 

‘체코 역사와 민족의 정체성’(푸른 사상)은 중부유럽에 위치한 체코의 기원부터 현재의 체코 공화국의 등장까지 내용을 다룬다. 

 

저자이자 역사학자인 김장수 교수에 따르면 체코의 역사는 프르제미슬 왕조의 보지보이 1세(867~94년) 때 시작했다. 이 왕조의 오카타르 2세(1253~78)는 적극적인 영토확장을 추진했고, 교황과 신성로마제국 내 제후들은 체코의 팽창주의에 반감을 표출했다. 특히 오카타르 2세 대신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추대된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 루돌프(1273~91)와 충돌은 1278년 모라프스케폴레에서 벌어진 전투로 발화했다. 여기서 루돌프에 굴복한 프르제미슬은 쇠퇴의 길을 걸었다.

 

프르제미슬의 빈자리는 룩셈부르크 출신 얀 루쳄부르스키(1311~46)가 뒤이었다. 체코는 얀 왕의 아들인 카렐 4세(1347~78)와 전성기를 열었다. 체코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카렐 4세는 ‘황금 칙서’를 공포하면서 체코를 제국 내 명실상부한 국가로 부상시키기도 했다. 

 

한편 종교개혁을 제창한 체코의 신학자 얀 후스(1372~1415)의 등장과 그에 대한 콘스탄츠 공의회의 대응은 갈등으로 이어졌다. 일례로 체코 귀족들은 당시 체코를 지배하던 합스부르크의 신교 탄압에 반발해 왕의 섭정관을 건물 밖으로 던져버리는 2차 창문 밖 투척 사건(1618)을 감행했다. 책은 이 사건으로 체코의 불행이 본격 시작했다고 평가했다. 프라하 성 창밖 투척 사건이 30년 전쟁(1618~48)을 초래했고, 30년 전쟁 중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와 대척점에 섰던 체코가 빌라 호라 전투(1620)에서 패배해 오스트리아에 편입됐기 때문이다. 

 

오스트리아 치하 체코는 18세기 말부터 친오스트리아주의를 내세우면서 민족운동을 시작했다. 친오스트리아주의는 러시아의 범슬라브주의에 의한 흡수를 견제한 것이다. 체코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자치권을 얻겠다고 표명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가 이를 무시하고 1867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선포해 체코는 새 방법을 찾아 나섰다.

 

자립을 열망한 체코는 1차 세계대전(1914~18)에서 슬로바키아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만들어 연합국을 지원한 점을 인정받아 1918년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공산당의 1946년 총선 승리, 1948년 공산당 출신 클레멘트 고트발트의 대통령 취임으로 소련 영향권에 들어갔다. 저자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화 원인을 비공산 계열 정당들이 공산당과 대립에서 의회민주주의적 방법만을 고수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이후 체코슬로바이카는 1989년 벨벳 혁명을 통해 민주주의로 전환했다. 다만 다민족국가였던 체코슬로바키아는 민족문제로 1993년 슬로바키아 공화국과 현재의 체코로 분리됐다. 

 

저자는 합스부르크가 체코를 지배하던 시절 민족문제를 국민적 동의 없이 일방적인 정책을 펼친 결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해제 수순을 밟은 점을 지적했다. 저자는 정부가 정책을 펼치기 전, 반드시 국민을 설득하거나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수순을 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책은 정부가 이 과정을 생략하고 정책을 강행한다면 거대한 저항이 따라온다고 설명했다. 이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처 과정에서 정부가 내리는 일방적인 결정 과정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계속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글·사진=김찬영 기자 johndoe9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