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는 유물이 됐고, 브라운관 텔레비전은 구닥다리다. 빨강 노랑 파랑 검정 흰색의 화면조정 배경을 본 적도 없는 사람은 앞으로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1960년대 비디오 설치 작품을 선보이며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활용해 미래적이고 실험적인 작업으로 미술사에 획을 그은 백남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로 불리는 그의 작품은 2020년대에 어떤 매력을 가질까.
과거의 신문물이 오늘 레트로가 될지언정, 그 누구보다 순수함을 뿜어냈던 거장의 예술정신은 2020년에도 쌩쌩하게 숨을 쉬고 있다고 말하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서울 종로구 창성동에 위치한 리안갤러리 서울의 ‘백남준 개인전’이다.
전시장 1층에서 관람객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1985년 작품 ‘무제’에서도 로리 앤더슨의 익살맞은 표정이 백남준이 덧댄 원색의 회화작품에 딱 맞아떨어진다. 미국의 전위예술가인 로리 앤더슨은 백남준의 친구로, 백남준이 기획한 1984년 1월 1일 인공위성 생중계 쇼 프로젝트 ‘굿모닝 미스터 오웰’에 함께해,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향해 비관 대신 낙관을 전파했다. 그 역사적 장면이 담긴 커다란 캔버스 구석에 덧대어진 백남준의 작은 회화작품은 마치 그가 신이 나서 찍어둔 자기만의 낙관(落款)처럼 보인다.
지하 전시장에서 만나는 판화 작품들도 백남준의 회화 세계를 잘 몰랐던 많은 사람들에게 ‘깜짝 선물’ 같은 작품이다. 바로 1989년 작품인 ‘진화, 혁명, 결의(Evolution, Revolution, Resolution)’ 연작이다.
‘진화, 혁명, 결의’는 구형 텔레비전과 라디오 케이블을 이용해 높이 3m의 비디오 조각으로 제작됐던 ‘혁명가 가족 로봇’ 시리즈를 판화로 제작한 것이다. 1989년 프랑스혁명 200주년을 맞아 프랑스정부가 제작 의뢰해 백남준은 ‘혁명가 가족 로봇’을 만들었는데, 여기에서 평면 작업까지 파생됐다. 8개 판화 속 각각의 로봇에는 마라(Marat), 로베스피에르(Robespierre), 당통(Danton), 디드로(Diderot), 루소(Rousseau), 올랭프 드 구주(Olympe de Gouges) 등 프랑스 혁명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을 붙였다. 각각 의인화된 로봇에 생명력 넘치는 강한 필체로 써내려간 ‘이성’, ‘자유’, ‘문화혁명은 예술혁명을 전제로 한다’ 등 한자와 한글로 된 진한 텍스트들이 메시지를 전한다. 판화들은 특유의 색감으로 다른 회화들과는 또 다른 매력을 뿜어낸다. 세련된 울트라마린과 카키색, 파스텔톤이 부드럽게 어우러진다.
비디오 작품 ‘호랑이는 살아있다’(2000년) 영상 속에 등장하는 그의 모습에선 새로운 메시지가 읽힌다. 당초 이 작품은 역사적 고난을 이겨내고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한민족의 강인한 기상과 생명력을 호랑이라는 상징으로 담아낸 것이었다. 빠르게 스쳐지나가는 호랑이 장면들 가운데, 잠시 그가 모습을 드러낸다. 1996년 뇌졸중을 겪은 그가 휠체어에 앉아 불편한 몸으로 호랑이를 그리는 모습이다. 불편한 몸임에도 천진난만하게 웃으며 아이처럼 크레파스로 낙서하듯 호랑이를 그린다. 마치 신체가 병들고 노화돼가도, 그의 예술혼은 갈수록 창의로 빛나고 순수해져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을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리안갤러리 서울 관계자는 “백남준의 회화는 한국 미술사에서 아직 활발하게 연구되지 않았다”며 “그 가치를 다시 보고 활발한 연구의 계기를 만드는 데 이번 전시가 기여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한국이 사랑한, 세상이 사랑한 거장 백남준에 대해, 모두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다 알려면 아직도 멀었다고 말한다. 그렇게 거장의 예술정신과 예술세계가 동시대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선물이 되는지를 보여준다. 내년 1월 16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