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직후 한국군은 ‘전차 공포증’에 시달렸다. 대전차포를 계속 쏴도 거침없이 내달리며 전선을 돌파하던 북한군 T-34 전차는 한국군을 무력감에 빠지게 했다.
미군의 지원으로 북한군 전차를 제압하기는 했으나, 이때의 트라우마는 오늘날에도 사라지지 않고 있다. 무반동총에 독일산 대전차 로켓, 국산 대전차 미사일 등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하지만 북한이 신형 전차를 잇따라 개발하면서 육군 보병이 쓰는 기존 장비 중 북한군 신형 전차 파괴가 어려운 것들이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바주카에서 현궁까지…“안 써본 게 없다”
6.25 전쟁 초기 한국군과 미군은 M9 바주카포를 썼으나 북한군 T-34 전차를 뚫지 못해 고전했다. 이에 미군은 개발 중단 상태였던 M20을 급히 제작해 전장에 투입했다.
3.5인치 바주카포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한 M20은 6.25 전쟁 당시 한국군과 미군에게 든든한 화력을 지원했다. 포신 등을 강철에서 알루미늄으로 교체하고 부품을 단순화하는 등의 개량이 이뤄졌다.
200m 거리에서 전차를 격파할 수 있었으며, 신뢰성이 좋아 베트남전쟁에서 벙커나 참호 파괴용으로도 쓰였다. 1970년대 초에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국산화하기도 했다.
1960년대 등장한 M72는 1회용이지만 저렴하고 가벼우며 크기가 작아 미군과 한국군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쓰였다. 200~550㎜ 두께의 장갑을 뚫을 수 있다.
전차의 방어력이 높아지면서 대전차화기로는 위력을 잃었지만, 값이 비싸고 수량도 적은 대전차미사일로 공격하기 어려운 보병부대 제압이나 벙커 파괴 등에 적합하다는 평가를 받아 이라크 전쟁 등에서도 모습을 드러냈다.
육군에서 복무한 사람이라면 한번은 봤을 90㎜ 무반동총은 M20 바주카포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됐다. 무반동총은 포탄 발사 시 배출되는 가스를 뒤쪽으로 분출해 반동을 낮추는 무기다. 크기는 작지만 대위력 포탄을 쏠 수 있다.
사수의 어깨에 올린 채 발사할 수도 있지만, 무반동총에 양각대를 설치, 지면에 대고 쏘는 방식을 주로 사용한다. 지프에 탑재해 사용하는 106㎜ 무반동총도 한국군에서 쓰인다.
1995년 한국군에 도입된 독일산 판저파우스트3는 한국 육군 보병의 화력을 한층 끌어올린 장비다. 발사기 구경(60㎜)보다 더 큰 110㎜탄두를 사용, 500m 거리에서 700㎜ 이상의 장갑을 관통한다. 발사기 1대로 3회까지 사격이 가능하다.
발사 반동과 소음이 낮고 연기 발생도 거의 없다. 후방 안전거리도 10m에 불과해 시가전에서도 유용하게 쓸 수 있다. 광학조준장치가 있어 M72보다 명중률이 높다.
2015년 ADD가 개발한 현궁 대전차미사일은 보병용 유도무기로는 국내 최초로 개발된 것이다. 2.5㎞ 떨어진 전차의 900㎜ 장갑을 뚫을 수 있다. 개인 휴대 또는 소형전술차량에 탑재해 전차의 상부나 정면 공격이 가능하다.
이중성형작약탄두를 사용해 반응장갑을 파괴하고 주 장갑을 관통할 수 있다. 외국의 동급 무기인 미국 재블린이나 이스라엘 스파이크에 뒤지지 않아 외국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다.
한국군은 미국산 토우와 러시아산 메티스M 대전차미사일도 사용한다. 1970년대와 1990년대에 도입된 토우는 관통력은 우수하나 유선유도 방식을 사용, 현대의 추세인 발사 후 망각(Fire & Forget)보다 뒤떨어진다.
1990년대 메티스M은 러시아에 대한 차관 상환 차원에서 실시된 ‘불곰사업’으로 도입, 기계화부대에서는 K200A1 장갑차에 탑재하는 형태로 운용한다.
◆수량은 많으나 효과는 미지수, 신형 교체 필요
문제는 북한군 전차 공격에 효과가 있는 장비가 많지 않다는 점이다.
북한은 사거리와 속도 등이 향상된 선군호 전차를 배치했으며, 지난해 10월 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는 이란의 즐피카 전차와 유사한 외형을 갖춘 새 전차를 선보였다.
정확한 성능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북한군이 오랜 기간 사용해온 러시아산 T-62 계열보다는 우수할 것으로 보인다.
수㎞ 거리에서 적 전차를 파괴할 때는 현궁을 사용할 수 있지만, 근거리 전투에서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무반동총은 발사 시 많은 연기가 발생해 위치가 쉽게 드러나고 관통력도 약하다. M72도 1회용인데다 관통력도 부족하고 노후했다.
군도 이같은 문제를 인식, 신형 대전차 화기 도입을 추진했다.
처음에는 해병대, 특전사처럼 화력 지원을 제때 받기 힘든 부대에 칼 구스타프 무반동총처럼 휴대가 쉽고 화력은 강한 장비를 지급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여기에 노후한 대전차 화기를 대체하는 것과 맞물려 2010년대 초부터 국내 개발이 추진됐다.
하지만 현궁과 120㎜ 자주박격포 등이 잇따라 전력화된 것과 달리 신형 대전차 화기는 방위산업 전시회에 모형이 등장한 것 외에는 별다른 소식이 들리지 않고 있다.
육군은 근거리에서 전차를 파괴하는데 초점을 맞추면서 무게는 판저파우스트3보다 가볍고 관통력은 판저파우스트3와 비교할 때 동등 이상의 수준을 원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개발 난이도를 높였다는 지적이다.
외국 제품 중에서는 스웨덴 사브의 칼 구스타프와 독일 DND의 RGW-110이 거론된다. 하지만 두 기종 모두 중량이나 관통력 측면에서 육군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하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경량화에 치중하면 관통력이 낮아지고, 관통력을 높이면 중량이 증가한다.
이같은 상황에서 북한군 전차의 장갑 최대치를 관통하는 능력을 우선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 제기된다. 관통하면 좋지만, 무기 개발이나 배치, 운용 편의를 저해한다면 어느 정도 양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부족한 부분은 새로운 전술 개발이나 탄종 확보 등을 통한 대안으로 대체할 수 있다.
현대전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보병부대가 쓰는 단거리 대전차 화기의 공격 목표는 전차 외에 벙커, 건물, 지휘소 등 다양해지고 있다. 1회용보다는 여러 차례 쓸 수 있는 화기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보병들이 많이 이용하는 헬기, 장갑차, 소형전술차량 내부 공간을 고려한 소형화와 경량화 추세도 여전하다.
실제로 미국과 일본 등 50여개 국에서 쓰는 칼 구스타프는 분당 발사속도가 5발로 연속발사가 가능하다. 독일산 판저파우스트3와 달리 1000발 이상 사격할 수 있다. 무게도 최신형인 M4가 7㎏으로 K-3 경기관총 수준이다.
인마살상용 고폭탄, 벙커를 겨냥한 이중목적탄, 건물을 파괴하는 다용도탄, 구조물 파괴탄, 조명탄, 연막탄, 화살탄 등 9가지 탄을 발사한다. 전차 외에도 다양한 표적을 공격해야 하는 현대 보병에게 적합하다는 평가다.
미군은 1990년대부터 칼 구스타프와 AT4를 도입, 성능개량을 거듭하면서 보병의 화력을 높이는 작업을 지속해왔다. 반면 한국군은 대전차 화기 국내 개발을 추진했던 지난 10년간 별다른 발전이 없었다.
한미 연합훈련을 실시할 때 미군은 칼 구스타프나 AT4를 갖고 나오지만, 한국군은 미군이 퇴역시킨 지 오래인 90㎜ 무반동총을 여전히 쓴다.
한미 육군 보병들이 연합작전을 벌일 때 미군과 유사한 장비를 갖추지 못한 한국군 보병부대가 미군 전술을 따라가게 되면 어려움이 클 수밖에 없다.
적지에 침투해 다수의 적군과 싸우는 특전사나 적 해안에 상륙하는 해병대는 문제가 더욱 심각하다. 북한군이 RPG 로켓과 박격포 등으로 공격해오면 화력이 부족한 특전사와 해병대는 위기에 몰릴 위험이 있다.
하지만 특전사나 해병대원이 17㎏짜리 90㎜ 무반동총을 휴대하고 적 후방에서 교전하는 것은 체력적으로 상당한 부담이다.
적군의 추격을 피하려면 화력을 단시간 내 집중적으로 퍼붓고 신속하게 움직여야 하는데, 무반동총과 탄약, 군장 등을 지참한 상태에서는 불가능하다.
반면 북한군 RPG는 명중률과 관통력은 부족하지만, 무게가 7㎏에 불과할 정도로 가볍고 구조가 단순하며 가격도 저렴하다. 북한군은 RPG를 분대까지 배치, 소부대 전투화력을 강화하고 있다.
한국군에도 현궁처럼 명중률과 화력, 유효사거리가 뛰어난 대전차 무기가 있지만,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탄종으로 소부대에 강력한 화력을 제공하는 무기도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해 해병대나 특전사에 칼 구스타프를 시급히 배치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어 군 당국의 대응에 관심이 집중된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