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국립현대미술관은 극심한 논란에 휩싸였다. 연중 주요 프로젝트로 서울관에서 시작한 ‘올해의 작가상’ 후보작 때문이었다. 후보 4명 중 한 명인 정윤석 작가는 ‘리얼돌’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와 설치작품을 내놨다. 리얼돌은 성인용품 중에서도 성적으로 과장된 여성의 신체를 실제처럼 실감나게 제작하는 것으로, 우리나라에는 풍속 저해 등을 이유로 수입 자체가 불가능했다가 2019년 여성계의 거센 반발 속에 허용됐다. 전시를 본 관람객들이 미술관 소셜미디어 계정에 전시 중단을 요구하며 항의했다. 공공기관에서 여성 폭력의 상징물을 소재로 한 작품을 ‘올해의 작가’ 추천작으로 전시할 수 있느냐는 글이 쏟아졌다.
미술관은 “작품은 ‘돈으로 인간 대용의 인형을 사고파는 당면 사회적 이슈’를 ‘비판적 시선으로’ 다룬 것”이라는 공식 입장을 게시했지만, 비난은 더 커졌다. 미술관 측은 계속된 비난이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미술관 관계자는 세계일보에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소외와 비관적 미래상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라며 “작품의 퀄리티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여성혐오가 반영됐다거나 리얼돌에 호의적으로 만든 작품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영화 속 장면은 일본인 남성 노인이 한쪽 어깨를 드러내는 옷을 입은 리얼돌 앞에 음식을 갖다주는 모습. 그는 “너 입술에 뭐 묻었다”며 리얼돌의 입술을 만졌다. 이어 영화는 그가 출연한 일본 방송 프로그램 장면을 통해 그를 소개했다. “부인과 별거하며 러브돌 5개와 생활하는 63세 센지입니다.” 영화는 센지가 리얼돌과 함께 데이트하고 밥을 먹고 씻고 잠을 자는 일상의 모든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는 중간중간 화면을 전환해 또다른 인물을 등장시킨다. AI(인공지능)당을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부패한 정치인을 몰아내고 로봇에게 정치를 시키자고 주장한다. 이들의 이야기는 센지의 일상과 교차편집돼 있지만, 전시작품 전체에서 비중은 상대적으로 작았다.
영화는 이들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센지가 얼마나 외로운지 인간인지, AI당의 당원들은 인간의 정치에 얼마나 실망했는지, 그들의 심정을 따라갔다. 감독은 센지와 마주앉아 그에게 외로움, 이별, 상실감, 첫사랑 등에 대해 질문한다. 작가는 센지에게 묻는다. “인간이 싫다고 하셨는데 그 의미를 다시 한 번 여쭙고 싶습니다.” 센지는 “돈이 있으니까 여자들이 사귀어주는 거잖아요. 인간은 배신을 하니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아요.”
카메라는 중국으로 이동해 리얼돌 생산 공장을 스케치한다. 어두운 표정의 한 여성노동자는 “여자인 제가 이런 물건을 접했을 때 프라이버시가 없어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부끄러워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아마 제가 생각이 많아서일 겁니다. 그냥 상품일 뿐이니까요.”
카메라는 리얼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여성노동자들이 이를 거침없이 만지고, 찢고, 지지고, 쑤시는 행위를 수없이 보여준다.
◆트리거의 전시장
작가는 센지를 이해하려 했고, 관람객도 센지에게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랐다고 작품 해설을 한다. 미술관은 이와는 조금 달리 영화가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암시하려는 의도라는 취지로 풀이한다. 어떤 의도이건 상관없이, 관람은 괴롭다. 미술관 설명대로 작가의 ‘비판적 시선’과 진정성을 믿어보려는 의지는 끊임없이 시험당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옆에서 번쩍거리는 설치작품의 포르노그라피적 재현은 관람객을 긴장감과 공포심으로 곤두서게 한다. 어떤 작품은 성폭력사이트 소라넷이 한창 문제가 됐던 때, 실제로 현실에서 벌어져 충격을 줬던 성폭력·살인사건이 연상되기도 한다.
영화는 AI와 리얼돌을 병치시키고, 일반 마네킹과 리얼돌을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영화에서 리얼돌이 단지 인간 대용품으로 설정돼 있으니 어쩌면 당연한 전개다. 성적 목적으로, 여성 신체를 극단적으로 물화하는 리얼돌의 핵심적인 특수성과 맥락을 누락한 것은 심각한 은폐가 아닌가, 의구심과 불편함을 떨칠 수 없다.
자극적으로 의도된 장면들은 결정적이다. 부분만을 클로즈업해 무슨 장면인지 알아볼 수 없도록 시선을 끌었다가 카메라가 뒤로 빠지며 일본 포르노 영상의 한 장면임을 뒤늦게 알아채게 유도하는 낚시성 장면, 리얼돌을 이용하는 센지의 모습을 담은 관음증적 시선에서 관람객의 선의는 기만을 당한다.
미술관을 나선 뒤, 불쾌하게 남은 잔상들이 두고두고 일상을 괴롭힌다. 전시를 보기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만이 남는다. 영화는 은밀한 폭력이었고, 설치작품들은 트리거의 전시장이었다. 혐오와 폭력으로 생사의 기로에 놓인 사람들이 실존하는 시대, 작가와 미술관은 마치 무슨 일이 벌어져온 사회인지 모르는, 다른 세상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