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로봇 소재로 써보라’ 제안 코로나로 디지털화 빨라져 도움 2년 전 신문사 신춘문예로 등단 체급 올리는 기분으로 장편 도전 ‘토지’처럼 인간의 내면 담아낼 것
“기술적인 진보에 대한 성찰이나 반성 없이는 로봇이나 인공지능(AI) 등이 산업에 의해 욕망의 도구가 될 수도 있고, 나아가 인간성조차 소멸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해 경고하고 그것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싶었어요.”
인간과 로봇의 관계를 비판적이고 흥미진진하게 다룬 장편 ‘언맨드(Unmanned)’로 국내 대표적인 장편문학상인 ‘2021년 세계문학상’을 거머쥔 채기성(44) 작가는 작품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느냐고 묻자 이같이 답했다.
작품은 로봇이 다양한 영역에서 인간 노동을 대신하거나 또는 친화적으로 도와주면서 로봇과 인간, 로봇과 로봇 등이 다양한 측면에서 갈등하고 대립하는 것을 통해 기술과 삶, 존재와 기억 등 철학적인 문제까지 과감하게 밀고나간 문제작이다.
그는 이미 2019년 신문사 신춘문예에 등단한 뒤 몇 편의 단편을 발표한 기성작가다. 단편과 장편에서 모두 자질과 역량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 셈. 현재 기업에서 마케팅 홍보 및 브랜딩 전략 업무를 맡고 있다.
채 작가는 지난달 19일 세계일보 사옥에서 가진 인터뷰에서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처럼 한 인간의 감정 내면을 보편적으로 스토리나 구조로 담아내고 싶다”고 기염을 토했다. 그의 말투는 차분하고 조곤조곤했다.
―작품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왔는지.
“홍보 쪽 일을 하는 아내가 ‘산업 기반이 되고 있는 로봇이나 AI가 인간 노동을 대체하는 것을 소재로 해서 쓰면 어떻겠느냐’라고 아이디어를 줬어요. 이를 고민하고 있을 때, 과학자와 인문학자가 대담하는 한 공영방송 대담 프로그램을 보다가 과학자는 기술의 진보를 이야기하고 인문학자는 기술 진보에 따르는 그림자를 얘기하는 대목을 봤어요. ‘앞으로 과학이 발전하더라도 인간성의 완충이라는 것이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인문학자가 과학자에게 질문을 던지자, 과학자는 ‘인간에게 이로운 일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것이 먼저’라고 대척점에서 얘기하더군요. 이것을 소재와 연관시켜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플랫폼에 의해, 로봇에 의해 기존 노동자들이 직무가 사라질 수 있겠다고 생각해 소설을 쓰게 됐지요.”
―집필 시기가 대체로 코로나19와 겹쳤을 것 같다.
“오히려 코로나19가 도움이 됐어요. 산업이나 생활에서 디지털화가 앞당겨졌고, 인간 사회의 거리를 어느 정도 띄워 놓는 작용을 했지요. 사람들이 거리를 둬야 하는 부문이 있는데, 그런 부문에서 인간의 정서라든가, 기억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녹여낼 수가 있었어요.”
―직장을 다니는 데다가 아이도 어려 작품쓰기가 어려웠을 텐데.
“아이를 밤 10시에서 10시 반쯤 재우고 그때부터 새벽 1, 2시까지 서너 시간 작업을 했어요. 피곤해서 아이랑 같이 자면 새벽에 깨게 되는데, 일어나 두세 시간 정도 글을 쓰곤 했지요. 글을 쓰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거의 매일 썼어요. 너무 피곤했지요. 가끔 대체 이 짓을 왜 하는지 모를 때도 많았고요. 등단하고 나서 일종의 형벌처럼, 의무처럼 글을 썼던 것 같습니다. (하루 몇 시간 정도 쓴 건가) 주말 같은 경우는 5시간, 평일에는 적으면 2시간, 많으면 서너 시간 정도 썼던 것 같아요.”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난 그는 1996년 가톨릭대학교에 입학해 심리학과 철학을 복수 전공했다. 2003년 중견 식품가공회사에 취직한 그는 3년여 치즈를 수입하고 구매하는 일을 했다고 한다. 창조적인(creative) 일을 하고 싶어 회사를 옮긴 뒤 마케팅 홍보와 브랜딩 전략 업무를 해왔다.
―문학적 삶에 대해 조금 말해 달라.
“12세 때 우연히 한 방송에서 성우들이 여류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소설을 극화해 낭송하는 프로그램을 보게 됐는데, 여성들의 목소리에 제 마음이 울리는 것을 경험했어요. 여성들의 목소리를 내면에서 내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후 글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됐고, 언젠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을 했지요.”
2005년부터 신춘문예나 문예지 등에 투고하기 시작했고, 30대 후반에 이르러 ‘안 되면 어떻게 되지’라는 위기의식이 들면서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019년 신문사 신춘문예로 이미 등단했는데.
“신춘문예로 문단에 등단했지만, 큰 주목을 받지 못했어요. 같이 등단한 작가들이 다른 지면에 실리는 것을 소외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조급증이 생기기도 했지요. ‘원했던 길에 들어섰는데 자칫하면 사라질 수도 있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고, ‘우연으로 당선된 것 아닌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지요. 투고도 쉽지 않았고, 문예지도 계속 줄어들었어요. 차로가 좁고 교통체증이 심한 것으로 느껴졌죠. ‘차로를 바꿔야 겠다’고 생각해 ‘체급을 올리는 기분으로’ 장편을 쓰기 시작했지요.”
―10년 후는 어떤 모습일까, 작가로서의 꿈을 들려 달라.
“등단하고 나서 소외된 시절을 보내왔기 때문에 상을 받는 기쁜 순간이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요. 규모가 큰 대회의 상인 데다가 어렸을 때 열망하던 작가들이 받은 상이어서 더 무겁게 느껴지더군요. 첫 등단할 때는 마냥 기뻤지만, 언젠가 사라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나 공포의 크기도 같은 무게 값으로 다가오는 것 같습니다. 박경리의 ‘토지’처럼 한 인간의 감정 내면을 보편적 구조로 담아내고 싶어요. 인간에 내재하는 감정의 소산을 이야기와 결합시켜 드러내보고 싶습니다.”
◆수상작 ‘언맨드(Unmanned)’ 줄거리
인간과 로봇 공존이 일상화된 세상. 어느날 로봇들의 일탈 이어지는데…
패션 회사를 운영하는 하정은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잘 믿지 못한다. 대신, 사람의 행동 정보를 수집해 마음을 읽는 것처럼 예민하고 정교하게 반응하는 어시스턴트 로봇 엘비를 인생의 동반자처럼 여긴다. 하정은 인간을 로봇보다 신뢰하지 않는다. 하지만 하정이 출장을 가 있던 어느 날, 평소 일상처럼 엘비가 먹이를 주지 않아 집에 있던 고양이가 굶어 죽게 된 사실을 알게 된다.
영기는 대학 강사로 일하다가 로봇에게 일자리를 빼앗겨 배달 일을 하고 있다. 인간의 노동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드는 로봇 비즈니스에 환멸을 느끼지만, 배달 일마저도 잃을 위기에 처한 영기는 자신이 잉여 같다고 여긴다. 그는 로봇으로부터 쓰임새와 필요에 밀려 일자리를 잃어왔기 때문에 무력한 존재감으로 고통스러워한다.
화가인 김승수는 아티스트 계열 로봇인 그리드를 통해 새로운 활력과 이익을 구축하지만, 로봇의 대작 여부가 문제가 되어 검찰에 의해 조사를 받게 된다.
해고당한 조수가 검찰에 제보한 것을 알고 분노를 느끼며 그리드에 더 애착하게 되지만, 그의 능숙한 팔처럼 존재해오던 그리드는 어느 순간부터 파업을 하는 것처럼 전혀 그림을 그리지 않기 시작한다.
로봇을 유통하고 시장 확대를 위해 고도로 정치화된 영향력을 펼치고 있던 단체, ‘IU(인텔리전스 유니언)’는 연이어 오류를 일으키는 로봇의 문제를 윤리적 차원에서 접근하기보다 커뮤니케이션의 불일치와 더불어 매뉴얼을 숙지하지 못한 인간의 부주의 탓으로 돌리려고 한다. 조직의 변호사인 영재는 구매자들에게 보상을 하거나 법적인 조처를 통해 문제를 덮는 데 앞장선다.
그 사이 인간과 네트워크의 통제를 벗어나 탈출하는 로봇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영기는 도시를 배회하는 그들을 목격한다. IU는 로봇들을 쫓기 시작하고 이를 막아서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이 과정에서 로봇과 로봇, 인간과 인간, 인간과 로봇이 갈등하는 동안 그들 서로는 존재와 기억의 문제, 기술과 삶, 생명과 시간의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고, 하정과 영기를 중심으로 한 인물들은 씨줄처럼 엮여 맞닿은 서로의 운명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김용출 선임기자 kimgija@segye.com
채기성 작가
△1977년 서울 출생 △가톨릭대 졸업 △2019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부문 ‘앙상블’ 당선으로 등단 △작품으로 단편 ‘앙상블’, ‘우리에게 있어서 구원’ ‘57분’ ‘감각과 지각’ ‘소리 만들기’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