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왕설래] 퇴계 선생 종가의 차례상

홍동백서 좌포우혜 어동육서 반서갱동…. 제사상을 차릴 때 따지는 격식이다. 이런 것을 모른 채 ‘뼈대 있는’ 집안에 갔다가는 자칫 낭패 보기 십상이다. “그런 것도 모르느냐.”

일반인조차 그런 격식을 따진 것은 언제부터일까. 조선 말엽부터라고 한다. 무너진 신분질서. “왕후장상이 따로 있느냐”며 너도나도 사대봉사(四代奉祀·4대 선조 제사)에 나섰다. 왕은 4대, 6품 이상은 3대, 7품 이하는 2대 조상을 모시도록 한 규율은 허물어졌다. 사대봉사에 나선 이들은 주로 누구일까. 부를 쌓은 신흥 계층이다. 제사상은 갈수록 화려해졌다.



‘조선유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의 집안은 다르다. 퇴계 종가의 차례상은 단출하기 짝이 없다. 떡국 북어포 전 과일 술 등 다섯 가지 음식만 올린다고 한다. 왜 그럴까. 그의 ‘언행록’을 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제자 김성일이 제례에 관해 물었다. 퇴계는 답했다. “가례 규정을 모두 따를 필요는 없다. 집안 형편에 따라 지내면 된다. 분수에 맞지 않게 지나쳐서는 안 되며 제수 그릇 수도 번거로이 할 것이 아니다. 번거로우면 모독이 되고 또한 청결히 할 수 없다.” 이런 유언도 남겼다. “내 제사상에는 유밀과를 올리지 말라.”

퇴계는 왜 그런 생각을 한 걸까. 그의 이름에는 ‘한유(寒儒·가난하고 청빈한 선비)’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는 가난했다. 김성일이 퇴계 언행록에 남긴 글, “선생은 나이 50이 되도록 집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봉에 집을 지었다가 중간에 죽동으로 옮기고….” 허례에 젖을 겨를이 있었겠는가. 안동 도산서원은 제자들이 지은 학교 건물이다.

퇴계는 제자들에게 이런 말을 했다. “국록을 받는 사람은 가난하다는 말을 해선 안 된다.” “세상의 많은 불미한 일은 오직 ‘구(求)’ 한 자를 좇아 일어난다…. 맑은 정신을 가다듬어 의(義)를 좇고 이(利)를 좇지 않는다면 죄와 욕을 받는 데 이르지는 않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도 달라지지 않는 것 하나가 있다. 물신과 권세를 좇는 세태. 부귀와 권세를 구하지 않은 퇴계. 그 종갓집 차례상에는 탐욕에 물든 세상을 경계하는 가르침이 담긴 게 아닐까.

강호원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