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서사시 ‘한라산’ 필화 사건을 겪은 이산하(사진) 시인이 22년 만에 신작 시집 ‘악의 평범성’(창비)를 상재했다. 이 시인은 수배 중이던 1987년 제주4·3사건을 다룬 시 ‘한라산’을 발표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석방 이후 오랜 기간 절필한 채 시민운동을 하다가 몇 해 전에야 활동을 재개했다.
제목 ‘악의 평범성’은 성실한 나치 장교였던 아이히만이 왜 무시무시한 유대인 학살을 아무 죄의식 없이 저질렀는가를 분석한 한나 아렌트의 개념으로, 지극히 평범한 시민들조차 성찰하지 않으면 거악에 빠질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한편으론 무고하게 희생되거나 자발적으로 희생한, 또는 선의와 신념을 지향하며 다른 길을 걸어온 이들과 익명의 존재를 소환한다. 심지어 시 ‘버킷리스트’에선 수배 중이던 자신을 은닉 또는 묵인해준 119명의 실명을 공개한다. 기형도, 나병식, 라종일, 박영근, 박종철, 백무산, 유시민, 정호승, 채광석, 한홍구 등. 3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의 시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시인의 말’에서도 단테의 ‘신곡’ 가운데 지옥문 앞에 새겨진 글 “여기 들어오는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는 구절을 인용한 뒤 “내 시집에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없더라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진 않는다는 점. 곧 봄이 오고 복사꽃이 필 것이다.
김용출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