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삶과 꿈, 정선·김홍도를 발견하다

신간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으로 본 한국 미술
김홍도, 화조·영모 등 많은 소재 그려
당대 평가 풍속화 두드러지지 않아
정선 산수화도 거친 측면만 논의돼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평가 달라져
민족적 자부심의 증거로 다시 탄생

기행 화가로 알려진 중인 출신 최북
실제는 화가로서 기대가 컸던 인물
전기문학 통한 상상력 발휘로 변신
필요에 따라 새로운 가치 부여된 듯
단원 김홍도의 ‘풍속도 화첩’(보물)에 실린 작품 중 하나인 ‘씨름’(왼쪽)과 ‘군선도’(국보)의 일부. 김홍도는 풍속화의 대가라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신선도가 그의 장점으로 특히 부각됐다.

“우리는 오랜 민족적·전통적 프레임 속에서 김홍도 풍속화에 너무 버거운 역할을 부여해 왔다.”

‘씨름‘, ‘무동’ 등이 담긴 ‘단원풍속도첩’을 통해 보고, 배워 상식처럼 되어 있는 ‘풍속화가 김홍도’의 지위가 정작 작가 본인에게는 ‘버거운 역할’일 수 있다는 주장은 꽤 도발적으로 들릴 수 있다. “겸재 정선의 산수화들은… 근대화의 진행을 맞이하는 가운데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으로 ‘발견’된 그림이었다고 할 수 있다”는 지적에서는 정선의 산수화에 특정한 필요에 따른 새로운 가치가 부여되었다는 생각이 담겨 있다.



‘명화의 탄생 대가의 발견’(고연희 엮음, 아트북스)이 전하는 이런 주장은 한국 미술의 명화, 대가에 평가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것이 “과거를 기억하는 현재의 한계, 과거를 미화하려는 다각적 욕망”에 따라 만들어진 것일 수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결국엔 ‘우리는 명화, 대가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마주할 수 있다.

◆민족적 자부심의 증거로 ‘발견’된 정선과 김홍도

정선 하면 진경산수, 김홍도라면 풍속화를 떠올리는 것이 이제 상식이지만 두 화가가 활동했던 그즈음의 평가는 사뭇 달랐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정선의 그림이 우리 국토를 사실적으로 그린 특성을 지목하지 않았고, 따라서 그런 이유로 정선을 칭송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금은 ‘화성’(畵聖)으로까지 평가받지만 18세기 중엽에는 심사정, 강세황 등에 견주어 “거친 측면만이 논의되었고”, 19세기에 이르면 “탐탁지 못한 대상으로 지목”되기도 했다.

김홍도에 대한 평가에서는 풍속화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화조, 영모, 산수 등 많은 소재를 잘 그렸고, 풍속은 그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특히 높은 평가를 받은 건 신선도였다.

정선, 김홍도는 일제강점기,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며 ‘우리 것’에 대한 필요와 욕구가 급격히 높아지며 이전과는 사뭇 다른 평가를 받게 된다. “민족공동체적 자부심을 증거하는 예술품을 찾고자 하는 노력” 속에서 두 화가는 “‘조선정취’, ‘조선적인 것’과 같은 수식어와 함께 조선 미술을 지탱하는 중추 역할”을 하게 된다. 성균관대 고연희 교수는 ‘진경’(眞景)이란 용어의 기원을 분석하며 “18세기에는 진경이란 표현에 민족적 주제를 언급하려는 의도가 없었다”며 “진경의 예술이 과거에 존재하였고, 그것을 그린 대표 화가는 민족자주사상의 소유자였다고 믿고 싶은 소망이 가상의 정립과 확산을 도왔다”고 분석했다.

김홍도의 풍속화에 대한 평가에서도 이런 시대적 소망이 투영되어 있다. 이화여대 김소연 교수는 “조선 후기 회화사의 구축 과정에서 김홍도의 풍속화는 조선적, 사실적, 근대적, 때로는 혁명적 장르로 재조명되었다”며 “동시에 중국식, 비합리적, 비사실적이며 상상의 산물이었던 신선도에 대한 텍스트는 점차 희미해졌다”고 지적했다.

◆상상력으로 극대화된 ‘기행의 화가 최북’

중인 출신의 최북은 술을 좋아한 ‘기행의 화가’로 유명하다. 금강산 구룡연에서 술에 취한 채 “천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지”라며 연못으로 달려들었다는 일화는 이런 면모를 압축해 전한다.

하지만 최북이 활동했던 당대의 사람들이 전하는 풍모, 그림에 대한 평가는 그의 기행보다 회화적 역량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실학자 이익은 일본에 통신사의 일원으로 떠나는 최북에게 “부상 가지에 걸린 태양의 참 형상을/부디 잘 그려 와 나에게 좀 보여 주게”라고 격려했다. 일본의 풍광, 문물을 잘 그려 올 것을 당부하는 이익의 시에는 최북에 대한 인간적 존중, 화가로서의 기대가 담뿍 담겨 있다. 강세황은 최북의 ‘송하초옥도’라는 그림에 대해 “예스럽고 아취가 있어 즐길 만하다”는 평을 남겼다. 홍익대 유재빈 교수는 “‘아취’, ‘예스러움’ 등의 평가는 일반적으로 후대에 최북의 그림에 대해 사용되는 ‘기이함’, ‘벗어남’과는 반대의 성격을 가진 덕목임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고 분석했다.

그렇다면 최북이 기행의 화가로 재탄생한 것은 왜일까. 중인의 신분이라 기록이 많지 않았던 최북이 죽은 뒤에 상상력이 적극 발휘돼 간행된 전기문학의 내용에 주목해야 한다. 남공철은 ‘최칠칠전’에서 자신이 직접 겪은 최북의 문사적 풍모와 대비를 이루기 위한 전해들은 이야기를 기록했다. 전해들은 이야기 속의 최북은 ‘술꾼’, ‘환쟁이’, ‘미친놈’의 모습이 강하다. 조희룡의 ‘최북전’은 무리한 그림 요구에 최북이 자신의 눈을 찔렀다는 일화를 처음 전하는 문헌이다.

유 교수는 최북의 이미지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두 문헌이 ‘평민 전기문학의 산물’임을 강조한다. 그는 “고매한 왕공 사대부만이 아니라 특이하고 재능 있는 평민들이 전기문학의 주인공이 된 것”이라며 “이야기의 설득력과 흥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최북의 기행에 대해 상상력을 발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