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국민청원’까지 올라온 경기 광명시 40대 여성 살인사건은 출동 과정에서 가해자의 이름이 담긴 신고자의 핵심 정보를 놓치면서 늑장 대응이 이뤄진 것으로 확인됐다. 신고자 A씨의 휴대전화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이 꺼져 있는 상황에서 가해자 B씨의 이름은 사건 현장을 특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하지만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 경찰은 인근 660여가구로 범위를 확대해 ‘기약 없는’ 탐문수사를 벌였고, 소중한 생명을 살리기 위한 ‘골든타임’을 허비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 112신고센터에서 가해자 이름 놓쳐…“42초 녹취록에는 담겨”
24일 경기남부경찰청은 최근 광명시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대응 과정에 대한 중간 감찰결과를 이같이 공개했다.
조사 결과, 경기남부경찰청 112신고센터는 지난 17일 0시49분 “칼을 들고 나를 죽이려 한다”는 여성 A씨의 신고전화를 접수했다.
112센터 접수 요원은 신고자의 위치를 물었지만 “잘 모르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대신 이 여성은 “(여기는) 광명인데 강○○의 집”이라는 단서를 남겼다. 접수 요원과 A씨의 대화는 42초간 이어졌고, 그대로 녹취됐다. A씨는 겁에 질려 있었고, 발음도 명확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신고를 받은 접수 요원은 이를 지령 요원에게 전달하고 곧바로 ‘코드제로’를 발령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가해자의 이름이라는 중요한 정보가 간과됐다. 코드제로는 납치, 감금, 살인, 강도 등 강력사건이 의심될 때 발령하는 최고 단계의 대응으로, 인근 경찰서로 전파돼 현장 출동이 이뤄진다.
사건을 접수한 광명경찰서 112상황실은 매뉴얼대로 지구대와 기동순찰대 소속 경찰관 21명을 호출했고, 이들은 신고 10여분 만에 현장 인근에 도착했다.
하지만 경찰은 A씨의 위치를 파악할 수 없었다. A씨의 휴대전화는 GPS가 꺼져 있어 접수 요원은 기지국과 와이파이 위치를 통해 얻은 정보로만 장소를 알아내야 했다. 이 경우 오차범위 반경은 50∼100m로 넓어진다. 결국, 다가구주택에 거주하는 660여 가구로 범위가 확대됐고 이 중 의심스러운 40여 가구에는 직접 진입했지만 현장을 찾는 데 실패했다.
확인이 늦어지자 광명경찰서 112상황실은 뒤늦게 오전 1시27분쯤 경기남부경찰청 접수 요원이 받은 신고 전화 내용을 다시 확인했다. 신고 이후 38분이 흐른 때였다. 경찰은 가해자인 50대 B씨의 이름이 누락된 사실을 비로서 알아챘다.
이후에야 B씨를 특정한 수사가 진행됐다. 10분 만에 주소를 확인한 경찰은 5분 뒤 B씨의 자택에 진입했다. 신고 접수 50여분 만이었다. A씨는 이미 B씨에 의해 살해된 뒤였다.
◆ GPS 무용지물, 660여가구 뒤져…신고 접수 38분 뒤에야 녹취록 재확인 ‘실수’
경찰 관계자는 “접수 요원과 지령 요원이 업무미숙 상태에서 급하게 상황을 전파하려다가 벌어진 일로 보인다”며 “잘못이 명확히 드러나면 엄중히 문책할 것”이라고 밝혔다. 감찰 대상은 출동 경찰과 112센터 요원까지 망라돼 있다.
이번 사건은 개인의 실수라기보다 항공기 사고나 원자력발전소 사고와 같은 ‘시스템의 문제’라는 지적도 나온다. 영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리즌이 제시한 ‘스위스 치즈모델’처럼 어느 한 단계만의 실수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여러 단계의 오류가 겹쳐 치명적 결과를 불러온 때문이다.
경찰에 따르면 경기남부경찰청 112센터는 하루 40여건의 코드제로 사건을 다룬다. 시간당 2건 가까운 긴급 상황이 발생한다는 뜻으로, 그만큼 원활한 운용이 이뤄졌어야 한다는 얘기다.
사건을 다룬 접수 요원은 경력이 1년에 못 미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지령 요원과 야간팀장이 사건을 공청·공유했고, 지휘본부는 경기남부경찰청 112센터였다.
통상 코드제로 사건이 발생하면 경기남부경찰청 112센터가 최종 지휘부가 돼 보고를 받고 지휘한다. 다만 실질적인 지휘는 해당 경찰서 112상황실이 맡아 현장의 출동반장과 협업한다. 이와 관련, 경찰은 사건 당시 컨트롤 타워가 제대로 작동했는지를 살펴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사건의 핵심인 42초 분량의 녹취록은 접수·지령 요원 외에 경기남부경찰청, 광명경찰서, 현장 출동 경찰에게 모두 공청(함께 들음)된 것으로 파악됐다. 이들 모두 녹취록을 접했지만 정작 가해자 B씨의 이름을 걸러내지 못했다.
여기에 GPS 기반의 위치추적 체계인 LBS시스템이 사건 당시 무용지물로 전락하면서 초동 대응을 위한 두 번째 방어선이 무너졌다.
경찰 관계자는 “112신고센터는 신고자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도 원격제어 등을 통해 신고자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췄다”면서도 “당시 신고자의 GPS가 꺼져 있거나 한 장소에 너무 오래 머물러 오류가 난 것으로 보인다. 원격제어 시스템도 가동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경찰은 또 사건 발생 30여분이 지난 당일 오전 1시20분쯤 사건 현장에서 1㎞ 떨어진 피해자 A씨의 집을 찾아 딸에게 어머니의 행적을 물었지만, B씨와의 관계나 집주소 등 뚜렷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 긴급상황 ‘컨트롤 타워’는?…경찰 신고·접수 체계 손봐야
B씨는 이날 오후 유치장이 있는 시흥경찰서에서 출발해 수원지검 안산지청으로 송치됐다. B씨는 A씨에게 “다른 남자를 만나지 말라”고 요구했고 A씨가 거부하자 다퉜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던 중 B씨는 자신이 담배를 피우러 나간 사이 경찰에 신고한 A씨가 다른 남자에게 전화한 것으로 착각하고 격분해 A씨를 둔기와 흉기로 수십 차례 공격해 살해했다. B씨가 A씨를 살해한 시간은 신고를 마친 뒤 5분 안팎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현장에선 A씨와 B씨가 함께 먹은 것으로 보이는 김밥 등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이 뒤늦게 도착했을 때 B씨는 의자에 앉아 범행을 모두 시인했다.
경찰은 대응 과정에 대한 감찰을 벌이고 있다. A씨 시신의 상태와 B씨의 진술 등을 토대로 A씨가 신고 전화를 한 직후 사망한 것으로 보고 있지만, 경찰관들의 현장 도착이 신속히 이뤄졌을 경우 A씨가 생존했을 가능성도 있는 만큼 철저히 감찰을 진행하겠다는 입장이다.
수원·광명=오상도 기자 sdo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