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인 여성 4명을 포함해 8명의 목숨을 앗아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총격 사건의 용의자 로버트 에런 롱(21)을 수사당국이 살인 혐의 등으로 기소했다. 롱은 이번 사건을 벌인 이유로 인종적 동기가 아닌 성 중독 등을 주장했지만, 한국계 미 의원들과 한인사회는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 범죄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수사당국에 철저한 수사를 촉구했다.
외신에 따르면 애틀랜타 경찰과 시 당국은 17일(현지시간) 이번 총격 사건에 대한 기자회견을 열고, 롱이 이번 사건은 인종적 동기가 아니라면서 자신이 성 중독에 빠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진술했다고 밝혔다. 당국은 롱이 스스로 성 중독 가능성을 포함해 몇 가지 문제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미 경찰은 이번 사건이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증오 범죄인지에 대해서도 조사 중이다. 다만 당국자들은 이 사건이 인종적 동기에서 유발됐다는 초기 징후를 갖고 있지 않다면서 증오 범죄인지 판단하기에는 이르다고 했다.
수사당국은 롱에게 8건의 살인과 1건의 중상해를 저지른 혐의를 적용해 기소했다. 전날 애틀랜타 근교 체로키 카운티의 마사지숍 한 곳과 애틀랜타 시내의 스파 두 곳에서 벌어진 연쇄 총격으로 8명이 숨지고 1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체로키 카운티 마사지숍에서는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부상했다. 이어 애틀랜타 시내 스파에서는 4명이 숨졌다. 스파 2곳의 사망자 4명은 한인 여성으로 파악됐다. 당국은 롱의 차에서 총을 발견했으며, 현장에서 발견한 유일한 무기류라고 밝혔다.
롱의 범죄 동기로 성 중독 가능성이 언급되는 것을 두고, 미 정치권과 한인사회 등에서는 이를 비판하며 증오 범죄 혐의에 대한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계인 매릴린 스트리클런드(민주·워싱턴) 미 하원의원은 이날 의회 발언을 통해 “어제 애틀랜타에서 발생한 비극적인 총격 사건으로 8명이 사망했으며, 이 중 6명은 아시아 여성”이라면서 “이것은 총기 폭력이고 여성에 대한 폭력”이라고 강조했다.
스트리클런드 의원은 “우리는 인종적 동기에 의한 아시아·태평양계(AAPI)에 대한 폭력이 급증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며 “우리가 이 사건의 동기를 경제적 불안이나 성 중독으로 변명하거나 다시 이름을 붙이는 것을 멈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저는 흑인이자 한국계로서 이런 식으로 (사건의 본질이) 지워지거나 무시되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잘 알고 있다”면서 “유색 인종과 여성에 대한 폭력 행위가 발생했을 때, 증오 행위가 아닌 동기로 규정하는 게 어떤지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태미 김 캘리포니아주 어바인 시의원도 트위터를 통해 “분명히 하자. 용의자는 아시아 여성들에게 집착해 그들을 쐈다”며 “이것은 증오 범죄로 취급해야 한다. 우리는 이 사건을 (증오 범죄가 아닌) 다른 것으로 부를 수 없고,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셸 박 스틸(공화·캘리포니아) 하원의원은 “이번 사건은 비극적이다. 아시아계 미국인에 대한 증오 범죄는 중단돼야 한다”며 “희생자들과 그 가족, 아시아·태평양계 공동체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고 애도의 뜻을 전했다. 미주 한인사회는 당국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는 가운데, 지역 단위별로 회의를 하고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한 대응책 논의에 나섰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번 사건과 관련해 아시아계 미국인들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면서도, 아시아계에 대한 증오 범죄인지에 대해선 수사 결과를 지켜봐야 한다며 신중한 입중을 취했다.
CNN방송 등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 문제로 법무부 장관, 연방수사국(FBI) 국장과 통화한 사실을 공개하면서 “수사가 진행 중이고 범행 동기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그는 “그러나 동기가 무엇이든지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매우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며 “알다시피 나는 지난 몇 달간 아시아계 미국인을 향한 잔혹 행위에 관해 얘기해 왔다. 나는 이것이 매우, 매우 힘든 문제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다만 “나는 지금 이 순간 살인자의 동기에 관해 어떤 연결도 짓지 않고 있다. 나는 FBI와 법무부로부터 답을 기다리고 있다”며 “조사가 완료되면 할 말이 더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바이든 대통령의 이번 발언은 롱의 범행 동기가 아직 분명치 않은 만큼, 일단 수사 결과를 지켜보겠다는 신중론을 피력한 것으로 해석된다.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희생자 가족에게 기도하고 있다며 아시아계 미국인 공동체에 대한 지지와 연대의 뜻을 전했다. 그는 “나는 아시아계 미국인 공동체를 향해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서 있고, 이 사건이 모든 사람을 얼마나 놀라게 하고 충격에 빠뜨렸는지 이해한다고 말하고 싶다”면서 “우리는 그들과 연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우리 누구도 어떤 형태의 증오에 직면할 때 침묵해선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기를 희망한다”고 호소했다.
이강진 기자 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