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의 자양분 ‘자연’… 과거와 현재를 잇다

호림박물관 기획전 ‘공명:자연이 주는 울림’

정선·김정희 등 전통시대 거장들과
김환기 등 현대 화단 대표작 한자리

청색·백색 회화와 달항아리의 조화
시대 넘나드는 대자연의 감동 표현
달항아리와 현대작가 정상화의 작품은 자연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묘하게 어울린다. 좌우균형이 깨진 달항아리는 자연친화적이며, 정상화의 청색과 백색은 각각 바다와 한국인의 정서를 드러낸다. 호림박물관 제공

자연을 담아서일까. 전시장 한편에 자리 잡은 달항아리와 그것의 배경이라도 된 양 벽에 걸린 정상화의 작품 ‘Untitled 96-12-5’, ‘Untitled 88-7-28’이 묘하게 어울린다. 구울 때 한쪽이 조금 내려앉아 좌우대칭이 깨진 달항아리는 시점에 따라 달라진 형태를 감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자연친화적이다. 정상화의 두 작품은 작가 고향인 마산 바다 색과 한국인 정서를 잘 드러내는 백색으로 화면을 채웠다.

이름 없는 조선 도공이 빚어낸 자기와 현대 화가가 그려낸 그림의 어울림은 자연은 언제나 창작의 자양분이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운다. 호림박물관의 올해 첫 기획전 ‘공명:자연이 주는 울림’은 이런 사실에 주목했다. 박물관은 예술과 자연의 관계를 ‘머묾, 품음, 따름’이라는 키워드 세 개로 정리해 각각을 대표할 만한 작품들을 전시했다. 정선, 강세황, 김정희 등 전통시대 거장들과 김환기, 김창열, 박서보, 이우환 등 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작가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색다른 경험이 될 만하다.



#자연에 머물다

산수화에는 다리가 종종 등장한다. 그 위를 걷은 인물을 그려놓기도 한다. 속세와 자연을 잇는 다리는 자연 속에서 노닐며 하나가 되고 싶어 했던 작가 욕망을 대변한다.

정선의 1719년작 ‘사계산수도 화첩’에서도 이를 읽어내는 건 어렵지 않다. 사계절을 그린 각 폭에는 누각과 집이 있어 자연과 하나가 되고 싶어했던 정신세계를 느낄 수 있다. 특히 봄의 경치를 그린 ‘호림한거’는 마주보고 서 있는 초가집 안에 책상을 묘사해 자연 속에 은거하며 책을 읽고 싶다는 바람을 담고 있다.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를 표현한 김창열의 ‘물방울’은 고향 자연을 배경으로 삼았다. 박물관은 “물방울을 반복해서 그려내는 것은 선문답 같은 세계의 되풀이이자 무(無)로 가는 과정”이라며 “바탕의 황토색은 작가의 고향 대동강 지류의 모래사장을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선비들이 이상적 풍경을 묘사한 것으로 여겼던 소상팔경도 화첩, 산수화 무늬를 그려넣은 도자기와 정상화, 이강소 등의 작품도 ‘자연에 머물다’란 주제로 묶여 관람객들과 만난다.

#자연을 품다

창작은 종종 인격의 표현이다. 특히 동양에서는 자연의 특정한 대상에 고결한 인격을 부여하고 시각화하는 전통이 이어졌다. 군자가 지녀야 할 덕목을 ‘매·난·국·죽’에 의탁해 시각화한 사군자 그림이 가장 잘 알려진 것이다. 정신성을 강조하는 경향은 현대 미술에서도 중시되었고, 작품에 내재된 정신성이야말로 작가의 정체성으로 이해된다.

최북의 사군자화첩은 자연에 고결한 인격적 특성을 부여하고, 정신성을 표현하려 한 전통을 잘 보여준다. 호림박물관 제공

출품작 중 최북의 사군자 화첩은 사군자에다 연꽃을 더해 문인 이상을 표현한 작품이다. 금강산 구룡연에서 술에 취한 채 “천하 명인 최북은 마땅히 천하 명산에서 죽어야지”라며 연못으로 달려들었다는 일화를 전하는 ‘기행의 화가’ 최북의 이미지와는 달리 문인화 정신을 잘 드러낸 작품이다.

윤형근의 ‘Umber-Blue’는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을 지켜보며 받은 충격으로 돌연 프랑스로 출국한 뒤에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긴 캔버스에 선비가 한 획을 그은 듯 강렬한 선이 표현되어 그가 갖고 있던 선비와 같은 절개, 올바른 신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자연을 따르다

가야토기와 이배의 ‘불로부터’는 자연의 재료가 사람의 손에 의해 형태를 갖추었으나 최종의 완성은 “자연에게 맡겨지는 무작위”에 기대고 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토기는 도공들의 손으로 일단의 모양을 갖춘다. 하지만 불가마 속으로 들어간 뒤에는 “인위적인 사고나 행위가 최대한 배제된 상태에서” 최종적인 색과 모양을 갖추게 된다. “가마 안에서 불의 온도와 분위기 등 다양한 환경에 따라 인위적으로 제어할 수 없는 색과 형태, 질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숯을 활용한 ‘불로부터’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창작된 작품이다. 소나무를 태워 만든 숯을 잘라 캔버스에 붙인 이 입체화는 작가도 어떤 모습을 띨지 알 수 없는 숯이 가진 물성을 활용한다. “작가에게 숯은 자연에서 와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가장 순수한 결정체로 이것을 통해 자연 자체를 드러내고자” 했다는 게 박물관의 설명이다.

오혜윤 학예연구사는 “자연을 중시한 전통적 창작 행위가 과거의 유산에 머물지 않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음에 주목했다”며 “자연을 주제로 삼은 이번 전시회가 관람객들의 마음을 치유하는 자리가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