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미희의동행] 인생의 지혜를 묻다

며칠 전 언니의 전화를 받았다. 나보다 다섯 살 위, 네 자매 중 맏이인 언니는 곧잘 어머니를 대신해 어른 역할을 자처해오던 이였다. 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던 교사였던 터라 종종 언니의 훈계는 학생에게 향하는 것처럼 엄했고, 엄마조차 생전에 그런 언니를 어려워하며 뜻에 따랐다.

언니는 언제나 그렇듯 안부를 생략한 채 제 할 말부터 했다. “책을 보냈다. 읽어보니 꽤 지혜로 삼을 만한 이야기가 있어. 그러니 곁에 두고 찬찬히 읽어봐라.” 한 지방신문 신춘문예에 소설로 당선된 이력이 있던 언니라, 혹여 그 글이 본인이 쓴 글인가 싶어 물어보았더니 아니란다. 듣는 대로 이해한다는 이순의 나이를 훨씬 넘긴 언니가 공감하는 그 지혜가 어떤 것인지 궁금했다. 그렇게 언니와 통화를 한 지 이틀이 지나서 택배가 도착했다. 한 권이면 족할 텐데, 언니는 굳이 동생과 나와 조카에게 한권씩 돌아가도록 마음을 쏟았고 그걸 가까이 두고 수시로 읽으라는 메모까지 첨부해 놓았다. 언니가 책을 보낸 건 처음이 아니었다. 얼마 전까지는 매달 성경공부를 하라며 관련된 책을 보냈고, 읽었는지 확인까지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대충 얼버무리며 넘어갔다.



한데 이번에는 여든을 넘긴 노수필가가 반세기의 생애 동안 느끼고 경험한 일들을 담담한 필치로 써내려간 수필집이었다. 외출한 가족을 생각해 이불 속에 밥을 앙구고, 시시때때로 이웃과 음식을 나누며, 힘든 시간들을 인내하는 지혜와 사랑의 실천들이 그 글들 속에 담겨 있었다. 그래, 우린 이렇게 살았었지. 어른들이 먼저 수저를 들어야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사람 사이에 예절이 있었지. 그때의 밥상머리 교육은 아이들이 덕과 올바른 품성을 가진 성인으로 자랄 수 있도록 이끌었지. 그 수필들은 마치 빛바랜 옛날 영화를 보듯 향수를 자극하고, 과거의 기억들을 불러냈다. 그때는 불문율처럼 시기마다 읽어야 할 책이 있었고, 우리는 그 책을 들고 한껏 폼을 잡은 채 성장해나갔다. 그때 통과의례처럼 시기마다 읽어야 했던 책들은 그 어떤 훈계와 공부보다 나를 더 자라게 만들었고, 풍성하게 가꾸어주었다. 한데 언제부턴가 우리에게서 이런 풍경들이 사라져버렸다. 인간이란 불완전한 존재여서 끊임없이 길을 묻고, 조심하며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지금은 어디 가서 인생의 지혜를 물을 곳이 없다. 나이라도 어리면 실수 또한 아름다울 텐데, 지금의 나이는 그런 실수조차 조심스럽다. 정말, 아직 미욱한 나는 인생선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다. 내 나이 때쯤의 세상살이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디까지가 최선이고, 어디부터가 탐욕인지 그 경계를 묻고 싶다. 누군가 조단조단 자신이 지나쳐온 삶의 과정들을 이야기해준다면 그걸 길라잡이 삼아 헤쳐 나갈 수도 있을 텐데…언니가 보내준 그 수필집이 아쉽게나마 그 길들을 일러준다. 그 길들을 챙겨준 언니의 마음이 고맙다.

은미희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