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역병에 휩싸인 시대에 국제음악제 개최는 난제다. 통영국제음악제(TIMF)도 그래서 2002년 출범 후 처음으로 지난해 취소 사태를 겪었다. 20주년을 앞둔 올해 TIMF는 심기일전해서 만반의 준비를 했으나 해외 아티스트가 내한을 취소했고 무대에 오를 예정이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는 부상하는 등 불운이 찾아왔다.
그런 TIMF 무대를 프랑스 파리에서 온 젊은 첼리스트 카미유 토마가 빛냈다. 2017년 도이체 그라모폰 전속 아티스트로 음반 계약을 맺은 후 ‘희망의 목소리’ 등 두 장의 앨범을 낸 신예. 세계 최고 음반사로부터 실력을 보증받은 셈이다.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파질 사이의 신작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를 2018년 세계 초연한 연주자로도 유명하다. 게다가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 때문에 봉쇄령이 내려지자 텅 빈 베르사유 등에서 홀로 첼로를 켜는 동영상을 공개한 ‘뮤지엄 프로젝트’로 더욱 유명해졌다.
전날 열린 TIMF 개막 공연 주인공은 이날 초연된 무용극 ‘디어 루나’의 두 무용수 ‘김주원’과 ‘한예리’였다. 마침 한산도 위로 달이 떠오른 한밤중에 펼쳐진 이 공연은 보름에서 시작해 하현과 그믐, 삭, 금환일식, 초승, 상현을 거쳐 다시 보름으로 돌아오는 달의 순환 과정을 풀어냈다. 국립발레단 출신 무용수 김주원이 달, 유니버설발레단 출신 무용수 이승현이 반달을 맡아 은하수를 연기하는 다섯 무용수와 함께 검은 밤하늘 같은 통영국제음악당 블랙박스 극장에서 신비롭고 몽환적인 춤을 췄다.
‘디어 루나’는 재기 넘치는 작곡가 김택수가 실력을 발휘한 무대이기도 했다. 미국에서 주목받는 신예 작곡가인 김택수는 ‘디어 루나’ 음악감독을 맡아 본인의 작품을 비롯해 존 아담스, 데이비드 랭, 슈베르트, 드뷔시 등 현대음악과 클래식을 재해석했다. 달빛 일렁이는 바다 아래에서 피아니스트 윤홍천이 김택수 곡을 연주하는 모습은 이날 공연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올해로 창단 10주년을 맞은 통영페스티벌오케스트라(TFO)는 ‘디어 루나’ 공연에 앞선 개막연주에서 크리스티안 바스케스 지휘로 윤이상의 ‘서주와 추상’, 차이콥스키의 ‘바이올린 협주곡’에 이어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을 연주했다. 무엇보다도 코로나19 시대에 접어든 지난 2년여 동안 듣기 힘들었던 70명 규모의 대편성에서 나오는 박력있는 소리가 반가운 무대였다.
또 바스케스는 베네수엘라의 서민층 아이들을 위한 음악교육 프로그램 ‘엘 시스테마’가 배출한 차세대 지휘자. 그는 “엘 시스테마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굉장히 좋은 기회였다”며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지휘를 할 수 있어서 영광스럽다. 코로나19로 어려운 시기에 희망을 전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시카고 심포니 악장 로버트 첸이 악장을 맡은 이번 TFO 연주에선 역시 엘 시스테마 출신인 펠릭스 멘도자가 팀파니를 맡아 4악장 등에서 대활약했다. 바이올린 협연자로는 김봄소리가 섬세한 표현력이 돋보이는 연주를 들려줬다.
TFO와 바스케스는 28일 한 차례 더 연주하는데 카미유 토마와 협연으로 터키의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한 것으로 유명한 파질 세이의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를 아시아 초연한다. TFO의 폐막 공연(4월 4일)은 오스트리아 출신 지휘자 사샤 괴첼이 베토벤 교향곡 8번과 모차르트 레퀴엠 D단조를 연주한다. 소프라노 임선혜, 메조소프라노 김선정, 테너 파벨 콜가틴, 베이스 박종민, 대전시립합창단이 출연한다.
통영=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