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 던진 행위예술·엽기적 조각… 남성중심 질서에 도발

설치미술의 거장 ‘이불:시작’전
80년대 후반 초기 활동시기 10년 조명
소프트 조각·퍼포먼스 영상 등 선보여

뉴욕 현대미술관에 충격 준 ‘장엄한 광채’
파격적 퍼포먼스 ‘낙태’ ‘수난유감-내가…’
30년이 지난 지금봐도 강렬하게 다가와

설치미술의 거장. 동시대 미술의 확고한 전위.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 꼭 알아야 할 세계적 예술가. 이 무거운 왕관을 여럿 쓰고 있는 국제적 인사는 한국인 여성작가 이불이다. 은발을 질끈 묶은 58세 중년의 세계적 권위자인 그는, 청년 시절 검고 긴 생머리를 풀어헤친 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출몰했다. 때로는 기괴한 옷을 입고, 때로는 나체로 거꾸로 매달린 채였다. 그가 온몸으로 비명을 지르면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듣기 위해 진지해졌다. 바로 그 시절, 이불의 ‘신세대’ 시절만 잘라와 돋보기를 대어 보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당시 그의 몸짓이 세상에 파동을 만들었기에 그 시대도 보이는 전시다. 서울 중구 덕수궁길에 위치한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에서는 ‘이불:시작’전이 한창이다. 이불의 초기 활동 시기인 1987년부터 약 10년을 조명한다. 남성, 이성, 정신성이 지배한 근대의 견고한 성벽에 여성의 신체인 자신의 몸을 끊임없이 던져 부딪치며 미술계에 등장했던 페미니즘 여전사 시절이다

 

퍼포먼스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기록 사진.

전시장에는 이번 개인전을 계기로 다시 제작한 참여형 조각 ‘히드라’를 비롯해 퍼포먼스 영상과 사진기록, 조각 등 크고 작은 자료 약 130점이 관람객을 맞는다. 이 가운데는 최초로 공개되는 드로잉 약 50점도 포함돼 있다. 이 자료들은 모두 청년 이불의 3대 시그니처인 소프트 조각과 퍼포먼스 ‘낙태’(1989), 설치 작품 ‘장엄한 광채’(1997)의 사이사이를 치밀하게 잇고 깊이 있게 들여다보기 위한 것들이다.

이불은 1982년 홍익대학교 조소과 입학 후, 기존 제도에서 중시했던 재료나 표현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딱딱하고 무거운 소재를 거부하고 부드러운 천과 가벼운 솜을 썼다. 조각으로 상상할 수 없던 재료들이었다. 그렇게 자기만의 조각세계를 만들어 나갔고, 그의 상징적 작품 형식인 ‘소프트 조각’이 됐다. 소프트 조각은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형태로 강렬한 저항의식을 내뿜어, 그 메시지는 결코 ‘소프트’ 하지 않았다. 오히려 청년 이불이 전장에 들고나온 가장 예리하고 단단한 검처럼 보였다.



1988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이불은 수많은 전시와 행위예술 축제에서 퍼포먼스를 폭발시킨다. 퍼포먼스 영상들을 모아 보여주는 거대한 암실은 이번 전시에서 가장 인상적인 공간이기도 하다. 이불 초기 작품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낙태’와 ‘수난유감-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 등 영상 12편이 상영된다.

이불. 호암재단 제공

작품 ‘낙태’에서 그는 서울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 관객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알몸에 줄을 묶어 천장에 매달린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고 몸부림치는 그를 관객이 구해줄 때까지, 그는 거꾸로 동동 매달린 채 버틴다. 고통과 치욕을 자처하는 행위예술을 통해, 현실은 여성에게 고통과 치욕을 강제하고 있음을 강렬하게 보여줬다.

 

‘수난유감’이라는 제목은 당대 여성들의 정신적 지주, 시인 최승자의 시 ‘다시 태어나기 위하여’의 3절에서 따왔다. ‘내 인생의 꽁무니를 붙잡고 뒤에서 신나게 흔들어대는 모든 아버지들아 내가 이 세상에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 줄 아느냐’는 구절이다. 제2회 한·일 행위예술제에서 12일간 소프트 조각을 입은 채로 김포공항과 일본 나리타공항, 도시 곳곳을 배회했다. 기존 젠더 질서하에서 여성의 수난을 표현했다.

퍼포먼스 영상 전시 전경.

그가 시도한 형식은 30년이 지난 지금 봐도 파격적이다. 주제 역시 여전히 절절하게 다가오는 문제의식이다. 그러나 더 인상적인 것은 대중과의 공명이다. 30년이 지난 구식 비디오 영상 화면의 흐릿한 화질을 뚫고 나오는 에너지는 이불만의 것이 아니다. 녹화 영상 속 퍼포먼스 현장에는 그의 손짓과 발짓, 시선을 좇는 대중의 반짝이는 눈빛이 있다. 그들은 이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려고 온 힘을 다해 침묵하고 집중한다. 몸을 물리적으로 움직이고, 신체적으로 고통을 느끼고, 행동을 저지당하며 화두를 던지는 이불과 군중이 만들어내는 현실세계의 파동. 온라인 가상세계 속에 살며, 현실에서는 키보드 위에 놓인 손가락 외에는 아무것도 움직일 줄 모르는 오늘의 의견그룹, 혹은 어떤 세태가 떠올라 대비를 이룬다. 우리가 1990년대를 그리워하는 것은 바로 이런 감각 때문이 아닐까.

설치작품 ‘장엄한 광채’의 일부.

전시는 ‘장엄한 광채’가 마무리짓는다. 1997년 그는 현대미술의 심장,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에 싸구려 비즈로 장식한 생선 전시를 감행하고, 미술관은 생선이 썩어 악취가 나자 전시를 중단한다. 큐레이터계의 전설, 하랄트 제만이 이를 목격하고 이듬해 리옹비엔날레에 고스란히 다시 소개한 작품이 바로 ‘장엄한 광채’다. 이불은 끝내 서구 대중에게 생선의 부패 과정을 직시토록 하는 데 성공했다.

싸구려 비즈가 아시아 여성이 주로 노동하는 수공예 재료임은 1차적 의미다. 연좌제 탓에 부모님이 취직을 하지 못해 평생 가내수공업으로 생계를 잇는 것을 소녀시절부터 바라봤다는, 그의 가정에 덮친 한국 현대사도 떠올리게 한다. 치장된 생선은 서구 남성 중심 시각의 폭력 속에 죽어가는 아시아, 여성, 신체의 교집합이다.

소프트조각 전시 전경.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국내에서 같은 시도를 한창 벌이던 1993년, 연합뉴스 노복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불은 “여성들이 늘 반찬을 만들기 위해 만지는 생선과 가내노동으로 스팡클(비즈 장식)을 붙이는 많은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최고의 찬사와 경이를 표현한 작품”, “부패해 가는 생물과 부패하지 않는 인조물의 극명한 대비, 죽은 물고기에 스팡클을 붙이는 행위 자체의 공격적이면서도 가학적인 의미도 표현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청년 이불은 당시 제도권 주류였던 미니멀리즘, 또다른 주류 민중미술 중 어느 쪽에도 속하기를 거부한 미술계의 무정부주의자였다. 그 결과 이불은 무언가의 거장, 어느 무리의 일원이 아닌, 자신의 이름 두 글자를 미술사에 새긴다. 5월16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s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