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군 노후 전투기 F-4와 F-5를 대체할 한국형 전투기(KF-X)인 KF-21 시제 1호기가 9일 모습을 드러냈다. 김대중 대통령이 지난 2001년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연설에서 전투기 개발 필요성을 강조한 지 20년 만이다.
KF-21은 지상 시험을 거쳐 내년 7월부터 비행에 나선다. 향후 4년간 2200여 회의 비행시험을 마친 뒤 2026년 공대공 전투능력을 지닌 블록-1 양산에 들어갈 예정이다.
체계개발에 8조1000억 원, 2026~2028년 추가 무장시험에 7000억 원이 투입되는 KF-21 개발은 미국이 핵심 기술 이전을 거부하면서 난항을 겪었다.
우여곡절 끝에 전투기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지만 한국형 전투기의 개발과 생산, 판매, 운용에 이르기까지 극복해야 할 과제는 여전히 많다. 범정부적 전략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판로 개척 ‘난항’ 가능성
전투기는 무기다. 동시에 상품이기도 하다. 성능과 비용 사이에서 최적의 타협점을 찾아야만 실질적인 전력화가 가능하다.
‘규모의 경제’(생산량 증가가 비용 절감과 수익 향상으로 이어진다는 원리)는 성능과 비용 간 균형을 유지하는 대표적 방법이다.
전투기 개발 단계서부터 자국 소요를 늘리고 적극적인 수출 마케팅을 실시해 생산량을 최대한 늘린다. 이는 규모의 경제 구축과 시장 확대를 통한 비용 절감으로 이어진다. 기술과 지식, 경영과 마케팅 노하우를 교류하며 시너지를 극대화할 수 있다.
이같은 방법은 서방 국가에서 주로 사용한다. 유럽 에어버스가 만든 타이푼 전투기는 영국, 독일, 스페인, 이탈리아가 공동개발에 참여해 700여 대의 계약 물량을 확보했다.
그 결과 유럽 4개국이라는 탄탄한 고객이 뒷받침된 규모의 경제가 만들어졌다. 이후 오스트리아, 사우디, 오만 등에 수출해 충분한 크기의 타이푼 시장을 만들었다.
독자적으로 규모의 경제를 추구해왔던 미국은 F-35 스텔스 전투기를 만들면서 영국,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을 대거 끌어들였고 한국과 일본 등에 추가로 수출해 F-35 시장을 형성했다.
한국은 어떨까. KF-21 개발에 참가한 나라는 인도네시아가 유일하다. 유럽처럼 구매능력이 뒷받침된 국가들을 더 끌어들여 일반적인 전투기 생산 손익분기점으로 평가받는 300대 안팎의 생산량을 확보했어야 했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현재까지 정해진 생산량은 인도네시아까지 합쳐도 160여 대에 불과하다. 비용 절감 효과가 F-35A, F-16V 등 경쟁 기종보다 낮다.
유일한 공동개발국인 인도네시아의 태도도 불확실하다. 인도네시아는 개발비의 20%인 1조7338억 원을 단계별 분담하고, 48대를 현지 생산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월 기준으로 분담금 8316억 원 중 6044억 원을 연체했다. 공동개발 의지를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장관이 8일 서욱 국방장관과 회담을 갖고 9일 시제 1호기 출고식에 참석했으나 이같은 상황이 단기간 내 해소되기는 어렵다는 관측이 다수다.
규모의 경제를 달성하지 못한 상황에서 수출에 대한 부담은 한층 무겁다.
방위사업청과 KF-21 제작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300~500대를 수출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시제 1호기 시험비행 직후 에어쇼 참가 등을 통한 마케팅에 적극 나설 방침이다.
하지만 KF-21에 대한 마케팅 전략 효과에를 놓고 의문이 제기된다. T-50 훈련기의 전례 때문이다. T-50은 우수한 성능을 지녔으나 미국 수출에 실패하는 등 최근 수년간 판매성과가 부진했다.
마케팅 전략에 한계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KAI는 KF-21의 단가를 6500만 달러(727억 원) 수준으로 낮추면 수출 시장에서 승산이 있다고 본다.
하지만 F-35가 지속적인 단가 하락을 통해 경쟁력을 더욱 키우고 있고, F-16V도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수출 시장에 나선 상태다. 프랑스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없은 라팔의 판촉도 활발하다.
금융지원, 산업협력 등 범정부적 지원이 없으면 T-50 미국 수출 실패가 반복될 수도 있다.
규모의 경제를 갖추지 못한 KF-21이 수출 시장에서 경쟁 기종에 밀린다면, KF-21의 앞날은 더욱 험난해진다. 최악의 경우 한국과 인도네시아만 사용하는 ‘KF-21의 갈라파고스화’가 벌어질 위험도 있다.
◆어렵게 확보한 첨단 기술 사라지나
기술은 기술을 만든다. 어느 날 갑자기 첨단 기술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이 아닌, 기존 기술을 토대로 발전된 형태의 기술이 나온다는 뜻이다. 이를 통해 첨단 기술과 경영 노하우를 이어갈 산업 역량을 키울 수 있다.
많은 기업이 시장에 신제품을 출시하면서 동시에 이를 뛰어넘는 제품 개발에 착수하는 이유다.
전투기도 마찬가지다. 끊임없는 연구개발을 통해 첨단 기술을 확보하면서 성능을 높인다. 미국, 영국,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 항공우주산업 선진국들은 이같은 원칙에 충실했다.
한국은 어떨까. 1980년대 F-5, 1990년대 KF-16 전투기를 국내 면허생산하고 T-50 훈련기를 만든 경험을 토대로 초음속 군용기 설계와 시스템 통합능력을 갖췄다, 덕분에 숱한 논란에도 KF-21 블록1 개발이 이뤄질 수 있었다.
문제는 개발 이후다. 2028년까지 공대지 전투능력을 갖춘 블록2 개발이 예정되어 있으나, 이보다 발전된 형태인 블록-3에 대해서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항모에 탑재할 KF-21 네이비도 검토되지 않는 상황이다.
일각에서는 기본 성능을 지닌 KF-21 블록1을 띄우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KF-21이 소요결정 직후 개발에 착수하기까지 10여년이 걸렸다는 점을 감안하면, 지금부터 관련 기술을 더 발전시킬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항공우주산업 연구 기반을 유지할 수 없다.
2030년대 차기 전투기 시장의 주역이 될 6세대 전투기 확보는 KF-21 기술을 유지·발전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독자 개발이든 국제공동개발 프로그램에 참여하든 KF-21을 통해 자체적으로 확보한 기술을 발전시킬 수 있다.
하지만 군 안팎에서의 움직임은 이같은 상황과는 다르게 흘러가고 있다. 대당 가격이 F-35A와 비슷한 수준인 4.5세대 F-15EX 20대 구매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실정이다. F-15EX 도입에는 2조 원이 넘는 예산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된다. F-15K 성능개량까지 합치면 5조 원 이상으로 폭증한다.
이보다 훨씬 낮은 비용으로 KF-X의 공격력을 강화하거나 6세대 전투기 탐색개발에 나설 수 있다. 굳이 거액의 혈세를 투입해 항공우주산업 분야에서 미국에 예속되는 길을 스스로 택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6세대 전투기 개발에 당장 뛰어들기 어렵다면,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이나 공대함미사일 등 전략적 억제력을 지닌 항공무장을 조기에 추가 장착하거나 파생형 기체를 개발, KF-21 연구개발 능력을 유지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국은 이제 전투기를 단순히 구매하는 나라가 아니다. 최신 전투기를 만들어 시험비행을 앞둔 나라다.
기술력과 자본, 세계 10위권의 경제력 등을 감안하면, 한국은 앞으로 현대전 개념에 맞는 첨단 전투기를 만들어 세계 시장에 출시해야 하는 국가다. 국산 전투기에 의한 전쟁 억제력 강화는 기본이다.
도면상으로만 존재했던 KF-21이 모습을 드러낸 시점에서 향후 10년은 한국이 4차 산업혁명 기술을 적용한 항공우주산업 국가로 발전할 지, 그저 그런 전투기를 만들었던 국가로 남을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이다.
수조원의 혈세를 들여 얻은 KF-21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항공우주산업은 활로를 찾기 어렵다. ‘포스트 KF-21’에 대한 정부와 군의 적극적인 정책이 요구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