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마이 갓.” 우리가 앉은 식탁 바로 옆에서 나르던 피자 접시를 떨어트린 젊은 여자 종업원의 입에서 튀어나온 발음도 정확한 비명이었다. 똑 떨어지는 원어민 발음이었다. 오래 별렀던 여행이었다. 언젠가 한번은 70년 전 허둥지둥 부모님을 따라나섰던 피난 길을 되짚어가서 전쟁을 피하여 살았던 시골 궁벽한 마을을 찾아가 보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마침내 용기를 내어 길을 나섰다. 마침 봄나들이 겸 함께 하겠다는 이 지역을 잘 아는 일행도 있었다.
정확히는 71년 전 어느 여름날 아침 전쟁이 도둑처럼 들이닥쳤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기 전날, 간신히 얻어 탄 기차로 서울을 떠나 닷새 만에 찾아간 곳이 섬진강변 마을, 읍에서도 면에서도 한참 더 들어간 촌 먼 외가 친척 어른이었다. 이분은 평상시에 늘 앞으로 큰 난리가 날 것인데 그 난리는 이제까지 우리가 겪은 어떤 난리보다 더 무서운 것이다. 만약 난리를 피할 생각이면 자기를 찾아오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창졸간에 부모님이 생각하셨던 것은 이 어른의 말씀이었다. 허둥지둥 찾아간 곳은 딴세상 같았다. 시골 생활이 처음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 마을은 또 달랐다. 마을 전체에 양복을 입은 사람이 없었다. 입고 있는 옷에서부터 음식 심지어는 같은 또래 아동들의 부르는 노래나 놀이도 서울과는 전혀 달랐다. 수십년 아니 어쩌면 수백년 동안 이 마을 사람들은 아무 변화도 없이 자연과 밀착된 생활을 이어 온 것이 아니었나 생각이 날 정도이었다.
그런데도 현실은 이곳을 비켜 가지 않았다. 마을 지서는 나름 요새처럼 방비가 되어 있었다. 외가의 장손도 어느 날 갑자기 산으로 갔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분 동생은 민방위대의 일원이었다. 언제건 빨치산이 습격해 오면 일역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어쨌든 이곳에서 산 3개월은 평소에 생각도 못 했던 새로운 경험들이었다. 가장 큰 기억은 이 마을에까지 찾아온 20세기의 정치, 전쟁과 “해방” 그리고 “수복”의 경험이었다. 짧은 기간 겪은 일 중에는 오랫동안 나를 괴롭히는 것들도 있다. 처음 사람을 죽이는 것을 보는 경험도 있었다. 어린 시절 개를 죽이는 것을 보고 처음 세상의 부정의함을 느낀 기억이 있었지만 사람을 죽이는 것은 또 달랐다. 가는 길에 오찬은 임실의 피자집이었다. 스위스의 어느 마을 하나를 옮겨 놓은 것 같은 조경과 건물들이 잘 정돈된 경치 안에 식당이 있었다. 피자집은 예약이 없이는 자리를 잡기가 힘들 정도로 인기가 있는 것 같았다. 피자와 파스타는 물론 손님들의 옷차림이나 대화도 외국을 연상하게 했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