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있어야만 존재하는 책장의 세계

텅 빈 책장은 단지 메꾸어야 할 구멍일뿐
항상 책과 있었지만 당연한 것으로 인식
두루마리 책 선반·사슬로 고정된 책장
세로로 꽂는 방식까지 보관방식 달라져
있는 듯 없는 듯 책장의 역사와 변화 담아
영국 헤리퍼드 성당의 도서관은 1500여 권의 책이 책장에 사슬로 묶여 있어 “현존하는 영국 최고의 사슬 도서관”이라고 불린다. 사슬로 책을 고정시킨 것도 인상적이지만 저자, 제목 등을 표시하는 책등이 보이지 않는 것도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특이하다. 서해문집 제공

책이 사는 세계/헨리 페트로스키/정영목 옮김/서해문집/1만8000원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책의 유통기한은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한 번 읽었다고 버릴 수 있는 게 아니며, 책장을 가득 채운 책은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인테리어다. 그리하여 쌓여 있는 책을 보는 것은 뿌듯함으로 충만한 행위다.

흥미로운 점은 이때 책들이 환호를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는 배경이자 무대는 책장이지만 그것을 언급하는 일은 거의 없다는 사실이다. 여분의 것, 당연한 것, 무시해도 좋은 것일 뿐이다. 심지어 책장이 비어 있더라도 그렇다. 텅 빈 책장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수평의 모습으로 단정하게 서 있는 책장이 아니라 거기에 부재하는 책이다. 책장에 비어 있는 칸은 어서 메꾸어야 할 구멍일 뿐, 책장 자체로 인식되지는 않는다.

헨리 페트로스키/정영목 옮김/서해문집/1만8000원

공학자이자 일상 속 사물들의 역사와 공학적 의미, 디자인의 유래를 추적하는 작업을 해온 헨리 페트로스키 미국 듀크대 교수가 ‘책이 사는 세계’에서 소개한 시 하나를 읽어보자.



“나에게는 책장이 하나 있다네/ 나보다 훨씬 부자인 사람들도 가지지 못한 것./ 그러나 책장 안에는 책이 없다네./ 책은 책장의 모양을 망칠 것이기 때문에”

저자의 시각은 책 자체보다는 책의 세계를 이루는 여러 가지 도구들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책의 재료가 되었던 파피루스와 양피지, 책을 책상에 고정시켜 두었던 쇠사슬, 철과 뼈 등으로 만들었던 필기구, 그리고 무엇보다 책장의 역사와 변화를 설명한다. 그것은 책을 쓰고 읽고, 보관하기 위한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책의 형식, 책을 바라보는 방식을 만들었다.

책장에 대한 감정과 평가를 고백한 기록은 고대로부터 전해진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세네카는 “서재가 목욕탕처럼 집의 필수적인 부속물이 되었다”고 ‘책 수집의 악’에 대해 썼다.

“값비싼 나무로 만든 책장을 사다놓고… 수천 권의 책 사이에서 하품을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경건하고 천재적인 작품들을 모아둔 이런 서재는 단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 벽을 장식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14세기 종교인이자 애서가였던 리처드 옹거빌은 삼나무, 고퍼나무로 만든 선반에 금과 상아로 무늬를 새겨넣고 “여기에 책들을 조심해서 옮겨다가 보기 좋게 배치해 놓았다”며 “기존의 책이 새 책이 꽂히는 것을 방해하지 않도록, 또 지나치게 많은 책을 꽂아 이웃한 책이 훼손되는 일이 없도록 했다”고 적었다.

책장 내부를 수평으로 가르고, 수직의 칸막이를 세워 공간을 만든 뒤 제목과 저자 등의 정보를 표시한 책등이 보이게 하는 방식이 지금은 워낙에 일반화되어 세네카나 옹거빌의 책장 역시 그러했을 것이라고 짐작하기 쉽다. 하지만 책의 역사가 오래된 만큼 책장의 모습 역시 지금과는 차이가 있었다.

르네상스 시기의 학자들을 묘사한 그림을 보면 책들이 사방에 제멋대로 널려 있는데, 딱 한군데, 서가 선반 위에는 없다. 또 책등을 보이고 수직으로 똑바로 서 있는 책도 없다. “수평의 선반 위에 수직으로 놓인 책이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파피루스나 양피지로 만든 두루마리가 책의 기본적인 형태일 때는 둘둘 말린 그것을 특정한 분류에 따라 모은 뒤 눕혀 놓은 게 일반적이었다. 세상의 모든 책을 모으겠다는 의지를 불태웠던 고대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을 묘사한 그림에서 이를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 양피지를 두 개의 나무판 사이에 넣고 제본한 코덱스가 등장한 후 두루마리와 코덱스가 공존하던 시기에는 책의 형식 차이 때문에 닫힌 책장이 널리 사용됐다. “두 가지 이질적인 형태는 개방적인 책꽂이에서 부조화를 일으켰을 것이고, 그 때문에 문을 닫아놓을 필요성이 더 절실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목과 저자 등의 기본적인 정보를 표시한 책등이 책장의 안쪽으로 들어가는 게 일반적이던 시절도 있었다. 이는 당시에 책등에 저자나 제목 등이 적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책을 책장에 고정시키기 위해 매달아 둔 사슬을 처리하는 데도 이런 형태가 유리했다.

책의 양이 급격히 늘면서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 잡은 것이 수직으로 책을 꽂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책을 보관할 공간이 늘어나고, 책을 뽑을 때도 큰 힘을 들이지 않아도 된다. 수평으로 책을 쌓아두었을 때 책을 옮기기 위해 다른 책을 옮기는 불편도 사라지게 되었다.

장서가 급격한 증가하면서 책장이 휘는 것을 막기 위한 아이디어를 만들어야 할 필요도 생겼다. 엔지니어들이 휨이라고 부르는, 책장 선반이 처지는 현상은 안전한 보관에 문제를 발생시킬 뿐 아니라 미관 상으로도 좋지 않았다. “책꽂이 설치에서 가장 자주 눈에 띄는 실수는 처짐의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서를 지낸 멜빌 듀이는 책을 완전히 채웠을 때 중앙이 처지지 않는 가장 적절한 길이는 경험상 100㎝라고 주장했다.

저자는 책에서 우리가 지금처럼 책을 색깔이나 길이에 맞춰 혹은 다른 어떤 기준에 맞춰 책장에 꽂는 것은 책 자체의 변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로 책장의 변화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책장은 책을 보관할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지만 동시에 책의 형식을, 우리가 책을 바라보는 방식을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