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 병사가 건넨 치즈, 그 맛 절대 못 잊으신대요”

이민 2세대 한국계 미국인 군의관 서 대령
미군, ‘아·태 문화유산의 달’ 맞아 집중 조명
독일 란트슈툴 미군 병원에서 안과 군의관으로 재직 중인 에이브러햄 서 육군 대령. 그는 이민 2세대 한국계 미국인이다. 미 육군 홈페이지

독일 라인란트팔츠주(州) 란트슈툴에는 주독미군 등을 위한 미 육군의 종합병원이 있다. 이 란트슈툴 미군병원에서 안과 군의관으로 재직 중인 에이브러햄 서 육군 대령은 한국계 미국인이다. 5월 ‘아시아·태평양계(AAPI)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미 육군이 서 대령의 사연을 집중 조명하고 나서 눈길을 끈다.

 

9일 미 육군 홈페이지를 보면 ‘이민 2세대 한국계 미국인의 눈에 비친 AAPI 문화유산의 달’이란 장문의 기사가 실렸다. 란트슈툴 미군 병원에서 안과 부책임자로 일하는 서 대령과의 인터뷰 내용이 담겨 있다.

 

“제 아버지, 그리고 장인 어른 두 분 다 6·25 전쟁(1950∼1953) 당시 10대 소년이었습니다. 제 할아버지는 전란 중 포로로 잡히셨다고 들었는데 그 뒤 행방불명이 되셨습니다. 할아버진 제 아버지를 비롯해 7남매를 두셨는데 할아버지가 안 계신 상황에서 할머니의 헌신적인 노력, 그리고 당시 한국에서 싸우던 미군 병사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그 7남매를 키울 수 있었죠. 아버지는 고국의 가족 곁을 떠나 전에 이름 한 번 못 들어본 나라(한국)를 지키기 위해 싸우던 미군 장병들한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계셨어요.” (서 대령)

 

서 대령의 부친은 어른이 된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훗날 서 대령의 아내가 된 여성의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 역시 서 대령 부친과 마찬가지로 성인이 되자마자 일찌감치 미국행을 택했다. 한국에서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그는 인터뷰에서 미국산 치즈를 늘 냉장고에 넣어두는 장인의 습관을 공개했다. 한 번은 장인에게 “왜 꼭 그렇게 해서 드십니까”라고 물었더니 어린 시절 주한미군과의 인연에서 비롯한 것이란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장인 어른께서 어릴 적에 한국은 음식 등 기본적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했죠. 늘 배가 고팠는데 하루는 주한미군 관계자가 장인 어른께 뭔가 건네더래요. 포장을 풀어보니 그 안에 미국산 치즈 한 덩어리가 들어 있었답니다. 장인 어른께선 지금도 그 신선한 맛을 못 잊겠다고 하세요. 미군 병사 한 사람의 별 것 아닌 선행이 일으킨 감동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저도 새삼 깨닫습니다.” (서 대령)

6·25전쟁 당시 미군 병사들이 한국 어린이들한테 선행을 베푸는 모습. 세계일보 자료사진

캘리포니아주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서 대령은 1997년 육군에 입대했다. 원래 그는 군복무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냥 의사가 되는 게 꿈이었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국립군의관대학원대학(USUHS)의 존재를 알게 됐다. 육해공군의 사관학교처럼 학비가 무료인 이 학교를 졸업하면 의사 자격증을 땀과 동시에 군의관으로 복무할 수 있다.

 

“요즘 젊은 의학도들 사이에 USUHS의 인기가 아주 좋습니다. 이 학교만의 독특한 기회, 그리고 학생들한테 제공하는 온갖 지원 등에 관해선 아무리 얘기를 해도 끝이 없어요. 저는 여러 진료과를 놓고 고심하다가 결국 안과를 택했습니다. 사람에게 있어 시력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이 중요하죠.” (서 대령)

 

‘이민자의 나라’ 미국은 군대도 다양한 인종과 민족 출신으로 구성돼 있다. 서 대령 역시 한국계 미국인으로서 어느덧 20년 넘게 군생활을 했다. 그는 ”수많은 부대에 배치돼 다양한 환자를 진료하면서 나 스스로 다문화 경험을 쌓아왔다”며 “인종 등 여러 차이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에 대한 존중하면 서로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미군이 건넨 치즈 한 덩어리가 장인한테 일으킨 변화를 거론하며 “우리가 별 생각 없이 타인에게 베푼 작의 호의 하나에 세상을 바꿀 잠재력이 깃들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군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자문해야 합니다. 계급이 높든 낮든 저 사람한테서 내가 배울 점이 무엇인지 말이죠. 군대는 복무하는 모든 이에게 기회를 제공하죠. 그 기회를 잡는 것은 전적으로 본인한테 달려 있습니다.” (서 대령)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