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적 M&A 방어 무기” vs “재벌기업 세습 수단 악용” [연중기획-포스트 코로나 시대]

차등의결권 도입 논란

OECD 국가 중 美·日 등 17개국서 실시
세계 유니콘기업들 빨아들이는 ‘블랙홀’

쿠팡 의장 지분율 2%인데 의결권은 58%
‘팀블라인드’는 美 나스닥 상장 계획 발표
“차등의결권 도입 땐 벤처기업 투자 촉진”

시민단체 “소유와 지배 괴리 키우는 작용”
“주주평등제 역행… 시장정의 흐려질수도”

정부 ‘주당 10개·상장 후 3년간 허용’ 추진
“경영권 방어 취약한 벤처에 큰 도움 될것”
3년후 보통주 전환에 “실효성 적다” 지적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세계 디지털경제 판도가 바뀌고 있다. 코로나19로 성큼 다가온 비대면시대에 우리 IT기업들이 앞다퉈 비대면 배송과 협업툴 시장, 인공지능(AI) 등 각 분야에서 글로벌 기업과 경쟁하고 있다. 하지만 벤처 스타트업이 유니콘 기업으로, 다시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벤처기업가들의 도전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차등의결권이 도입돼야 한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재벌기업의 지배를 위한 편법으로 악용될 것이라는 우려와 경쟁력 있는 벤처기업을 위한 필수 정책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차등의결권 도입이 코로나19와 함께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다.

 

◆왜 국내 기업들은 해외 주식시장에 상장하나

 

19일 업계에 따르면 기업들이 표면적으로 인정하고 있진 않지만 미국을 비롯한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증권시장이 세계 유니콘기업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로 떠오르고 있다. 야놀자, 핀테크 스타트업 비바리퍼블리카,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등이 미국 뉴욕증시 상장을 검토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업계 안팎에서 나오고 있고 직장인 익명 커뮤니티 블라인드를 운영하는 팀블라인드는 이미 미국 나스닥 상장 계획을 밝힌 바 있다.

 

이는 비단 우리 기업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시아 기업 가운데 자국 증시에 상장하지 않고 다른 나라 증시에 상장한 사례들이 있는데 대표적으로 중국 전자상거래 업체 알리바바다.

 

2013년 홍콩 거래소에 상장하려 했지만 차등의결권을 허용하지 않아서 뉴욕으로 선회했다가, 2018년 홍콩이 차등의결권을 허용하자 재입성했다. 바이두도 차등의결권주식을 허용하는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했다.

미래 성장성을 더 높게 평가해 사업이익·매출·자기자본 등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미국 증시의 특성도 있지만 기업들이 미국 증시에 나서는 많은 이유 중 하나는 보유 주식 수가 적어도 의결권한을 많이 가질 수 있는 차등의결권 때문이다. 차등의결권은 적대적 M&A를 막고 기업 경영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

 

차등의결권은 말 그대로 주식에 대한 의결권을 다르게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 상법 369조는 의결권을 주식 1주마다 1개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지만 차등의결권은 대주주의 주식에 대해선 보통주보다 많은 의결권을 부여한다.

 

최근 차등의결권에 대한 논의에 불을 지핀 것은 미국 증시에 상장한 쿠팡이다. 일각에서는 쿠팡이 미국행을 택한 이유가 바로 이 차등의결권이 국내에는 없어서란 분석이 내놨는데 실제 쿠팡의 미국 뉴욕증시 상장이 현실화하면서 김범석 쿠팡 의장은 1주당 29배에 달하는 의결권을 갖게 됐다. 지분율은 2%에 불과하지만 의결권은 58%에 달하게 된 것이다.

 

중소기업연구원 분석 따르면 특정 구간에서 벤처기업의 대주주 지분율이 1%포인트 오르면 연구개발투자액이 최대 500만원 넘게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차등의결권 도입이 벤처기업의 투자를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2018년 기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국 가운데 미국과 일본 등 17개 나라가 차등의결권을 도입한 상태다. 미국 실리콘밸리의 상위 150개 혁신기업 가운데서는 차등의결권 도입률이 해마다 늘며 현재 13%에 달한다.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해 각 국가에서는 차등의결권을 포함해 기존 주주에게 신주 저가 인수권리를 부여하는 포이즌필, 1주만으로 특정 주총 안건에 대한 거부권 행사가 가능한 황금주 등의 제도를 도입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적대적 M&A를 방어하기 위해 마땅한 제도가 마련돼 있지 않다. 현재 차등의결권이 경영권 방어수단으로 거론되는 이유도 자사주 매입 정도 외에는 적대적 M&A에 대응하기 위한 뚜렷한 무기가 없기 때문이다.

 

◆재벌세습 악용 반대의견도…정부안은 실효성 논란

 

하지만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국내 재벌의 세습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에 차등의결권 도입을 걱정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차등의결권은 적은 자본으로 기업을 지배할 수 있는 등 소유와 지배의 괴리를 증대시키는 수단 중 하나가 될 것이라며 도입을 반대하고 있는 상황이다. 경실련 재벌개혁본부 권오인 국장은 세계일보와의 통화에서 “차등의결권이 도입될 경우 재벌 4세 경영인들이 벤처기업을 설립해 일감 몰아주기라든지 자체적 증자로 기업을 키울 수 있다. 이후 기업 가치가 커지면 그걸로 모회사 지분을 사버리면 바로 그룹 전체를 지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상법에서 허용하는 주주평등제를 위반해 재벌들을 위해 차등의결권이 악용될 수 있고 시장정의가 흐려질 수 있다는 게 권 국장의 이야기다.

 

정부도 이러한 시민단체의 우려를 감안해 주당 10개까지, 상장 후 3년 동안 허용하는 내용을 담은 차등의결권 제도 도입을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소벤처기업부가 발의한 벤처기업 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은 비상장 벤처기업에 한해 1주당 2개 이상 최대 10개까지의 의결권을 허용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법이 통과되면 자금력이 달려 경영권 방어에 취약한 벤처기업에는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게 정부의 생각이다. 투자를 받아 성장하는 벤처기업의 창업주가 지분을 확보하지 못해 외부자본에 휘둘리는 등의 상황을 막고, 아이디어를 안정적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장 후 3년이 지나면 1개의 의결권만 갖는 보통주로 전환된다는 개정안의 내용 등을 감안하면 지금의 정부안은 실효성이 작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부안은 차등의결권 도입 대상을 현재 벤처 인증을 받은 비(非)상장 기업으로 제한하고 있는데, 국내 약 360만개의 중소기업 중 3만9000개(약 1%) 정도만이 차등의결권 도입 대상이다. 특히 대규모 투자 유치로 창업주의 보유 지분이 30% 밑으로 떨어질 경우 최대 10년까지만 차등의결권 주식을 발행하고, 상장 후 3년이 지나면 보통주로 전환해야 하는 점도 한계로 꼽힌다. 유럽이 각 기업의 업종과 성격에 맞게 자율적으로 소멸기간을 정한 것과 달리 정부안이 일률적으로 3년의 기간을 정한 것은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제한 규정이라는 이야기가 나온다.

 

김건호 기자 scoop3126@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