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의 순간도 놓치지 않는 존재감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여우주연상 이봉련
고뇌하는 햄릿대신 복수의 화신 햄릿 공주로
“어디든 잠깐 나와도 모든걸 보여주는 배우” 호평
“연기로 받은 첫 상 … 연기 할수록 두렵고 무서워”

눈 밝은 이에게 제57회 백상예술대상에서 가장 빛난 스타는 연극부문 여우주연상 이봉련이다.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 ‘햄릿’ 주연으로 탄 상이지만 ‘개성파 배우’로서 이봉련 진가(眞價)는 방송가, 영화계에 이전부터 유명하다. 봉준호 영화감독은 ‘가장 주목하는 연극배우’로 이봉련을 지목하고 영화 ‘옥자’에도 캐스팅했다. 이정은 배우는 “잠깐 등장해도 기승전결을 보여준다”고 칭찬했다.

세계일보와 지난 17일 가진 인터뷰에서 이봉련은 “정말 (시상식장에서) 호명될 때까지 수상할 줄 몰랐다”며 “태어나서 상을 처음으로 받은 듯하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는 상이에요. 어릴 때 개근상도 성실해야 받을 수 있는데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인생에서 유일하게 연기로 상을 받았습니다. 너무 감사하고 큰 상인데 그 크기도 가늠이 안 돼요. 유일하게 연기에 성실하게 임해서 준 개근상처럼 느껴집니다.”



‘개근상’ 같다지만 지난해 국립극단 역사상 세 번째 ‘햄릿’에서 이봉련이 보여준 연기는 엄청났다. 고뇌와 우유부단 사이에서 헤매는 통념 속 햄릿이 아닌 ‘행동파 해군사관 출신 공주’라는 새로운 햄릿을 보여줬다. 이봉련은 “‘여성으로서 햄릿을 한다’는 생각보다 왜 제가 햄릿을 맡은 건지 궁금했다. ‘이봉련’이라는 배우가 햄릿이어야 하는 이유가 더 궁금했다”며 “공연팀은 ‘이봉련’이 풀어나간 햄릿을 존중해 줬다. 이번 각색 본은 원작과 다르게 흘러가는 지점이 있다. 고뇌하는 햄릿에 그치지 않고 ‘복수자’로 가는 햄릿이었다. 그 부분에서 저를 많이 믿어줘서 부담을 덜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봉련에게 배우로서 처음이자 가장 큰 상을 준 ‘햄릿’이지만 우여곡절도 많았다. 극장 화재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대유행이 겹쳐 공연 연기, 일정 축소를 거듭하다 결국 온라인으로 단 사흘만 공연됐다.

왼쪽부터 국립극단 연극 ‘햄릿’의 주인공을 맡은 배우 이봉련이 지난 13일 백상예술대상 시상식장에서 연극부문 여우주연상을 받은 후 수상소감을 말하고 있다.TV드라마 첫 출연작인 ‘응답하라 1994’,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드라마 ‘스위트홈’ 출연 장면.

“지난해 4월 캐스팅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후 7월에 처음 대본 리딩을 하고 9월부터 연습에 들어갔죠. 그러다 극장 화재 등으로 개막이 연기되면서 연습도 한 달 더 늘어났어요. 마스크 쓰고 연습하고 검술 훈련하고, ‘헉헉’거리다 호흡곤란이 올 지경이었는데…. 그만큼 배우들은 열심으로는 표현이 모자랄 정도로 더 열심히 준비했는데 ‘서울시 천만시민 긴급멈춤’ 때문에 결국 공연 개막 전날 밤 취소 통보를 받고 집에 갔죠. 술 한잔 마실 수도 없이 헤어졌어요. 그랬는데 상을 받으니 (감정이) 갑자기 폭발하데요. 웃지도 울지도 못하고 헤어졌다가 ‘온라인 극장’ 상영이 결정돼서 촬영을 위해 단 한 번 다시 모여서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며 무대에 선 작품이었습니다.”

그저그런 따분한 삶이 싫고 무기력해져 고등학교 입학 1개월 만에 그만둔 학업은 검정고시로 이어갔고 사진작가를 꿈꾸며 사진 전공으로 대학원까지 끝마쳤다. 무대와 인연은 우연히 만들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은 연기수업에서 만난 연출가가 자신의 공연을 도와 달라고 했고 또 그 공연에서 만난 배우가 연극 오디션 참여를 제안한 게 배우 인생의 시작점이다. 무기력했던 삶에서 발견한 연기에는 그토록 성실하게 임했던 이유를 묻자 이봉련은 “우리가 준비를 한 이야기를, 그게 뭐라고 관객이 극장까지 찾아와서 불 꺼진 객석에서 봐주신다”며 “무대에서 배우가 이야기를 풀어나갈 때 작지만 관객 삶에 영향을 미친다. 생각의 변화 등이 작지만 생긴다는 게 연기의 제일 큰 매력이다. 대단한 걸 하지 않지만 어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이 잠시나마 움직일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이라고 말했다.

영화에선 2011년 ‘그대를 사랑합니다’ 동사무소 여직원역, 드라마에선 2013년 ‘응답하라 1994’ 여수친구역으로 첫선을 보인 후 다양한 작품에서 짧더라도 잊기 힘든 굵은 인상을 남기는 연기로 맹활약 중이지만 배우 이봉련 본향(本鄕)은 대학로다. 작품성과 대중성을 두루 인정받는 대학로 터줏대감격인 뮤지컬 ‘빨래’에 2008년부터 2012년까지 주인할멈 역할로 출연했다. 이어 박근형 연출가가 이끄는 극단 골목길에 들어가서 ‘전명출 평전’, ‘청춘예찬’, ‘만주전선’, ‘보도지침’ 등 다양한 작품에서 자신만의 연기로 확고한 입지를 다졌다.

“(배역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하긴 했는데 너무 ‘잠깐 출연’이 반복돼 힘든 시기도 있었어요. 잠깐(출연)일 때가 더 어렵거든요. (화면에) 계속 나오면 서사를 갖고 연기를 풀어갈 시간이 주어지는데 잠깐이면 촬영 현장의 낯섦까지 감내하면서 ‘치고 빠져나가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 역할, 캐스팅 목표에 딱 부합하는 연기를 잘해줘야 하니 부담감이 커지죠. 지금은 많은 분이 기억해줘서 고마운데 그런 (무명의)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 시간도 없었을 거예요. 나한테는 당연히 걸어왔어야 할 길이고 시간이었다 싶습니다. 저한테는 모든 게 의미가 있습니다.”

2005년 데뷔 배우로 연기 인생 20년을 바라보는 지금 마음에 대해선 ‘어렵고 무섭다’는 심경이다. 이봉련은 “하면 할수록 어렵고 무섭고 두렵다. 더 예민해진다”며 “내 연기에 영향력이 생기는 게 두려워서 마음이 예민해지고, 작업할 때 생각 안 해봤던 지점도 생각하게 된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이런 욕심이 좀 더 나이가 들면 내려놓아 질까 하는 기대를 해본다. 지금은 하면 할수록 두려움이 생기는 시기”라고 말했다.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