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재우의미·중관계사] 태평천국 시기의 미국과 청나라 관계

청나라는 태평천국의 진압에 미국의 도움을 요청했지만 사실상 거절당했다. 그럼에도 마셜 공사는 이를 수용할 것을 윌리엄 마시(William Marcy) 국무장관에게 요구했다. 별 소득이 없자 그는 중국에 정박한 미 해군 함대사령관 매슈 페리(Mathew Perry)를 설득하려 했다. 페리 총독의 관심은 그러나 청나라가 아닌 일본이었다. 그는 한 달 뒤 뱃머리를 돌려 1853년 7월에 일본으로 떠났다.

마셜이 이렇게 미 당국을 설득하려는 이유는 하나였다. 강한 중국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그의 파면이 무색하게 미국은 결국 1856년에 2차 아편전쟁에 참전한다. 새로운 조약 체결의 기회를 엿봤기 때문이다. 외교관으로 전환한 피터 파커(Peter Parker)는 미국의 더 적극적인 중국정책을 선전했다. 대만의 합병과 중국의 영토도 할양받을 것을 주장했다. 제임스 뷰캐넌(James Buchanan) 대통령은 이를 모두 무시했다.

미국인 용병이 조직한 양창대. 출처:위키피디아

그러자 미국 내의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뉴욕타임스는 1858년 8월 20일자 사설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강압적인 중국 개방 방식을 호평했다. 그리고 미국의 소극적 정책을 혹평했다. 결국 2차 아편전쟁에 소극적이나마 참전한 결과 1860년에 체결된 톈진조약으로 여론을 잠식시킬 수 있었다.



조약의 미국 버전은 중국의 추가적인 요구를 별첨으로 붙였다. 분쟁 발생 시 미중 양국의 상호원조를 포함했다. 청나라의 대미 신뢰가 유효했음을 방증했다. 이의 대가로 중국도 미국의 요구사항을 수용했다. 모든 종교를 인정하고 선교사가 개항장 이외 지역 어디서든 토지 구매를 할 수 있는 조항 등이었다.

 

이를 계기로 미국은 중국인 개종자를 대변할 수 있게 됐다. 중국 내정에 미국의 간여가 급속히 이뤄지는 결과도 보게 됐다. 미국은 태평천국의 진압에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대신 미국인 용병 프레데릭 워드(Frederick T. Ward)가 조직한 양창대(洋槍隊)를 통해 이뤄졌다. 미중이 비공식적으로나마 군사적으로 연합한 첫 사례이며 양국의 신뢰 구축의 기반을 닦는 계기가 되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