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13일 영국에서 열리는 G7(주요 7개국) 정상회의 직후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따로 회담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95세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그간 무려 12명의 미국 대통령과 만났는데 이번 바이든 대통령까지 더하면 총 13명의 미국 대통령을 상대하게 된다.
미국 입장에서 보면 1952년 2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즉위했을 당시의 해리 트루먼부터 현 바이든까지 대통령만 총 14명이 배출됐다. 이 가운데 1명만 유일하게 영국 여왕과 회동하지 않은 셈이다. 재임 중 암살당한 존 F 케네디(2년 10개월 재임), 부통령으로 있다가 대통령직을 승계한 제럴드 포드(2년 5개월 재임)처럼 임기가 짧았던 대통령도 다 만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한 번도 대면할 기회가 없었던 미국 대통령은 바로 린든 B 존슨이다.
◆케네디 암살 후 취임한 존슨, 경호에 각별한 주의
1963년 11월 취임해 1969년 1월까지 5년 2개월가량 백악관을 지켜 임기가 짧은 것도 아닌 존슨 대통령은 왜 영국 여왕과 만나지 않았을까.
29일 미 언론에 따르면 존슨 대통령이 1950년대 이후 임기 중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만난 적 없는 유일한 미국 대통령이 된 가장 큰 이유는 ‘경호’와 ‘건강’이다. 존슨 본인이 케네디 대통령 밑에서 부통령으로 있다가 1963년 11월 케네디가 암살을 당하며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경험이 있다. 그 뒤 백악관 경호당국은 대통령의 신변 안전에 엄청난 주의를 기울였고, 존슨 본인도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해외순방을 자제했다.
더욱이 존슨의 임기는 미국이 주도하는 베트남전쟁으로 인명피해가 급증한 시기와 겹친다. 미국 국내는 물론 유럽 등 전 세계에서 벌어진 대규모 반전(反戰)·반미(反美)시위가 세계 외교 무대에서 존슨의 행동반경을 더욱 좁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줄담배’ 존슨, 건강 나빠져 해외출장 가급적 자제
여기에 존슨 본인이 임기 내내 건강이 나빠 해외출장을 꺼린 점도 한 원인으로 꼽힌다. 존슨은 젊은 시절부터 엄청나게 담배를 피워댔고 그로 인해 여러 차례 심장에 문제가 발생했다. 대통령 취임 후 한때 금연했으나 대통령으로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다가 다시 담배에 손을 댔다. 백악관에 있는 동안 건강이 크게 악화한 그는 퇴임 후 사실상 은둔생활을 하다시피 했다. 결국 그는 65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즉위 후 여러 차례 미국을 방문했다. 하지만 존슨 행정부 시절엔 미국을 찾지 않았다. 이와 관련, 미 언론은 존슨의 임기 중인 1963년 당시 37세이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넷째를 임신해 이듬해인 1964년 3월 막내 에드워드 왕자(웨식스 백작)를 출산한 점을 거론한다. 마흔에 가까운 나이로 임신과 출산, 그리고 산후조리를 해야 했던 여왕의 처지를 감안할 때 1960년대 중반 해외출장은 힘들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1965년 처칠 장례식이 절호의 기회였지만 끝내…
존슨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만날 절호의 기회가 딱 한 번 있기는 했다. 1965년 1월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가 91세를 일기로 타계했을 때다. 영국 정부는 미·영 두 나라가 손잡고 싸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지도자였던 처칠을 기리기 위해 미국 대통령이 몸소 장례식에 참석할 것으로 기대했다.
당시 프랑스 샤를 드골 대통령을 비롯해 세계 각국에서 현직 국가원수 여럿 명이 조문을 하러 영국을 찾았고, 실제로 미국 국내에서도 “대통령이 조문 사절을 보내는 대신 직접 영국을 방문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존슨이 처칠 장례식 참석을 위해 영국에 갔다면 당연히 그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만남이 성사됐을 것이다.
하지만 존슨은 장례식 불참을 택했다. 이 결정은 영국 정부를 상당히 서운하게 만들었고 2차대전 이래 지속돼 온 영·미 양국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미국 보수진영도 존슨을 거세게 비판했다. 존슨이 왜 처칠 장례식에 안 갔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만 미 언론은 경호 문제, 그리고 나쁜 건강이 존슨으로 하여금 영국행을 주저하게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