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컨대 천고(千古·아주 먼 옛날)의 학술과 문장이 나에게 재단되어야지 그것들이 나를 재단할 수는 없으며 나에게 부려져야지 그것들이 나를 부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 나는 나의 말을 말하면 그뿐이지, 남이 나에게 어찌하겠습니까.”
조귀명(1692~1737)의 이런 선언은 옛날의 학문과 문장을 감히 왈가왈부할 수 없는 금과옥조이자 불문율로 여겼던 당대의 선비들에겐 낯설고, 불경스럽기까지 했을 것이다. 조귀명에게도 옛 학문과 문장은 큰 권위를 가진 공부의 대상이기는 했다. 하지만 삶의 구체적 국면에서 스스로 깨달아 얻은 것을 기준으로 삼았고, 그 중심에는 ‘나’가 있었다.
개인에 주목한 이들의 철학을 잘 보여주는 것이 유한준의 ‘각도기도론’(各道其道論)이다. 각자 자신이 정한 도에 따른다는 것으로 도의 정점은 일괄적이지 않고 각자의 원칙과 방법을 하나의 도로 삼아 자신의 이상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원칙을 추구했던 유한준은 남들이 써주기 마련인 묘지명(죽은 이의 덕과 공로를 정리한 글)을 스스로 정리했다. ‘천하제일의 문장’을 추구했던 신유한은 성리학적 관점에 따라 도를 보완해 주는 의미로서만의 문학이 아니라 문학 그 자체로 독립된 가치를 가진다고 주장했다. 이는 “문장이야말로 개인이 온전히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하는 것”이라는 정의를 도출하는 바탕이 됐다.
주류의 관점, 태도와는 거리가 있는 이런 주장들이 그저 특이한 이론 정도가 아니라 당대에도 나름의 힘을 발휘하고, 후대에까지 이어진 것은 이들이 자신의 힘과 실력을 스스로를 증명하는 ‘나력’(裸力)을 가졌었기 때문이다. 나력은 권력이나 지위와는 상관없는 나만의 실력을 의미한다.
정약용이 재야의 ‘문형’(文衡·저울로 물건을 다는 것과 같이 글을 평가하는 자리)이라고 평가했던 이용휴는 끊임없이 책을 찾아다닌 장서가이자 독서광으로 자기만의 시선으로 삶과 죽음, 세계를 표현하는 글들을 쏟아냈다. 신유한은 평균 합력 연령이 34세였던 진사시에서 25세에 합격했고, 이즈음 자신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시 ‘촉석루에 제하다’를 내놓았다. 일본에 파견된 조선통신사의 일원으로 참가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해유록’은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함께 ‘기행문의 쌍벽’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타락한 주류를 비판하는 동시에 당대 조선 사회에서 불가피하게 소외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이들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보인 것도 눈에 띈다. 유한준은 “세상의 소위 사대부가에 주색잡기에 빠진 이들이 많다”, “돈을 산처럼 쌓아놓고 호의호식하며 자라났지만 배우지 못해 무식하기까지 하니 괴장하고 망측하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중인, 서얼층과는 깊고, 넓게 교류했다. 이런 사귐의 대표적인 대상이 중인으로 서화 수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국이다. 김광국은 자신의 서화 컬렉션 ‘석농화원’의 발문을 유한준에게 부탁했는데, “그림을 알면 진정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진정 보고 싶고, 보면 그것을 모으게 되면 이는 모으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명문을 낳는 계기가 됐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