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사랑하는 열아홉 청년이 뇌사 상태가 된다. 그의 심장은 죽음이 예정돼 있던 50대 심장질환자에게 이식된다.’ 단 두 줄로 압축되나 삶과 죽음 사이에서 생겨난 여러 갈래 이야기가 섞인다.
연극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는 뇌사한 청년 심장이 이식 수술로 다른 이 가슴에서 다시 뛸 때까지 24시간을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추적한다. 1967년 첫 수술이 시행된 후 지금은 우리나라에서도 매달 열 건 이상(2020년 173건) 이뤄지는 심장 이식. 병원 바깥에선 큰 관심거리가 아니지만, 그 현장에선 매번 고통과 갈등 끝에 어려운 선택이 이뤄진다. 수술실에선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온몸에 피를 내보내는 생명의 경이가 그 실체를 드러낸다.
◆코디네이터의 원칙
담담하게 하늘에서 내려다보듯 전개되던 극 전개는 시몽 어머니가 등장하면서 마치 3인칭에서 1인칭 시점으로 전환하듯 몰입하게 된다. 아들이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는 통보를 받고, 어머니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는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그 고통스러운 상황은 “다른 시공간의 목소리여서 너무 낯설다. 모든 일이 일어나기 전의 세계에서 온 목소리. 그녀의 역할은 그를 이 세계로 끌어오는 일”이라는 해설로 간명하나 충분히 전달된다. 병원에서 부부가 만나 포옹하며 무너지는 장면은 일인극인데도 그토록 생생한 건 훌륭한 연기 덕분이다.
이후 극을 이끌어가는 배역은 장기이식 코디네이터 토마 레미주. 매번 큰 고통을 겪고 있는 환자 가족에게 어려운 이야기를 해야 하는 이의 내면을 배우는 침착하게 객석에 전달한다. “중요한 것은 부모님 생각이 아니라 시몽이 살아있었다면 어떤 생각이었을까입니다.” 의사, 코디네이터, 그리고 시몽의 부모 넷이 모인 장면에선 합리를 추구해온 나라 프랑스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만든 장기 이식 제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론과 현실을 자막까지 동원해 보여준다. 프랑스는 사전에 장기 기증을 거부한다는 명단에 등록하지 않은 이는 별도 절차 없이도 장기 적출이 가능하다는 법 조항이 있다. 그런데도 토마는 가족 동의를 원칙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런 가족 면담의 현실은 삼 분의 일이 이식 거부로 끝난다고 한다.
◆생명의 잠재력, 심장
‘살아있는 자를 수선하기’가 보여주는 최고의 장면은 수술실이다. 강렬한 빛과 손짓만으로 메스가 인체를 가르고, 심장을 둘러싼 동맥과 정맥을 자르는 모습을 선명하게 만들어낸다. 뛰어난 원작을 연극이 더욱 빛낸다. 새로운 배역은 쉬지 않고 등장한다. 장기이식센터 베테랑 직원과 통화 끝에 시몽 심장을 받기로 한 심장이식수술 권위자는 자신의 환자에게 전화를 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을 살던 오십대 심장질환자는 “오늘 밤 수술이니 바로 병원으로 오라”는 통보를 받고 기쁨보다는 타인의 심장을 받는 무거움에 압도된다.
마지막 주인공은 이탈리아 출신 수련의 브리질리오다. 민새롬 연출은 다른 어느 배역보다 브리질리오를 생생한 인물로 만들어내는 데 공들였다. 섬세함과 체력을 모두 가진 최고의 심장외과의 재목이다. 야망이 큰 만큼 우쭐대는 면도 있으나 미워하기 힘든 캐릭터다. 수술 욕심 많은 브리질리오는 상사 지시로 시몽이 누워있는 병원으로 가서 심장을 적출한다. 시몽이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 순간은 엄청난 파도소리가 극장을 꽉 채운다. 교통정체를 뚫고 브리질리오는 병원에서 공항, 다시 병원으로 이어지는 길을 달린다.
마지막은 심장질환자의 혈액 순환을 외부 기계가 맡고, 고장 난 심장을 들어낸 후, 새 심장을 넣고, 전기 자극으로 다시 뛰게 하는 실제 심장 이식 과정을 고스란히 재현한다. 여유 있게 수술 상황을 통제하는 고참 집도의, 어려운 수술에 참여할 기회를 잡은 수련의, 쉴 새 없이 수술도구를 건네며 집중해야 하는 간호사, 그리고 처음 보는 놀라운 광경에 압도된 인턴 몫까지 단 한 명의 배우가 돌아가며 연기하는데 마치 눈앞에서 현장을 보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짧은 기다림 끝에 심장이 다시 뛰는 장면은 일상에서 잊고 살았던 심장의 무게, 그리고 생명의 경이를 느끼게 해준다. 심장은 생명의 잠재력이다. 국립정동극장에서 6월 27일까지.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