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희는 국가보훈처가 보낸 공식적인 ‘노예’예요.”
15년째 ‘보훈섬김이’(보훈대상자에게 재가복지서비스를 제공하는 인력)로 일해 온 김경숙(가명·63)씨는 자신을 ‘몸종 부리듯’ 대하는 보훈대상자들을 만날 때면 일에 회의를 느낀다고 했다.
취재과정에서 만난 많은 보훈섬김이가 고강도의 가사노동을 하고 있다고 호소했다. 이들을 더욱 힘들게 하는 것은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한다는 생각이었다. 보훈대상자는 물론 그 자녀까지 김씨를 아랫사람 대하듯 부리며 ‘갑질’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한 보훈섬김이는 “며느리나 자녀분이 보훈처에 전화해 ‘수도꼭지를 안 닦고 갔다’는 식으로 항의를 한다”며 “일을 시켜 놓고 ‘우리 며느리 전화 한 통이면 넌 끝난다’고 하는 어르신도 있다. 존중받지 못하는 느낌”이라고 토로했다.
보훈섬김이들의 몸과 마음은 무너져가고 있다. 14일 국가보훈처노동조합에 따르면 노조가 지난달 조합원 62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79.5%가 가사 위주의 업무로 정형외과 진료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또 50.4%는 ‘가사 위주의 서비스로 직업만족도가 저하된다’고 했다.
◆보훈섬김이 업무 범위 지침 유명무실…“보훈처가 갑질 방조” 주장도
물론 업무 범위를 규정한 지침은 있다. 보훈처의 지침에는 △가사활동(취사·세탁·청소 등) △건강관리(식사수발, 말벗, 치매 예방 등) △편의지원(병원동행, 산책, 심부름 등 외부활동 지원)이 명시돼 있다. 업무에 가사활동이 포함돼 있기는 하지만 일상생활을 불편 없이 수행하는 데 돕는 정도다. 김장이나 명절음식, 대청소, 밭일 등은 원칙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란 얘기다.
그러나 노조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보훈대상자가 요구하는 업무에 대해 ‘지침에 적혀 있는 대로만 수행한다’는 응답은 13%에 그쳤다. 46%는 ‘보훈대상자들이 원하는 일은 다 들어줄 수밖에 없다’고 답했고, 34.6%는 ‘원하는 업무를 거절했더니 대상자가 화를 내거나 지방보훈청에 민원을 제기한 경험이 있다’고 전했다. 한 보훈섬김이는 “무리한 요구를 해 못한다고 했더니 ‘그럴 거면 왜 오냐, 노인이 시키면 군소리 말고 하면 되지 계집애가 말대꾸한다’는 사람도 있었다”고 전했다.
이 같은 무리한 요구는 보훈처 탓이라는 지적도 많다. 한진미 노조위원장은 “보훈처 공무원이 보훈대상자에게 ‘보훈섬김이는 막 부려먹어도 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거나, ‘우리가 돈 주는 사람이니 청소를 빡세게 시키라’고 안내한다”며 “보훈대상자들은 ‘보훈처가 뭐든지 시키라 했는데 왜 말을 안 듣냐’는 식”이라고 말했다. 이어 “보훈처가 업무 영역 등을 정리해 줘야 하는데 유공자에 대한 ‘예우’에 함몰돼 오히려 보훈섬김이에게 ‘왜 어르신 말을 안 들어주냐’고 탓한다”며 “보훈처가 갑질을 부추기고 방조하고 있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보훈처 관계자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다 보니 이상과 현실 사이에 괴리가 발생한 것”이라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종민·이지안 기자 jngm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