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살 때 무용을 시작하고 열두 살 때 첫 개인 발표회를 연 무용 천재. 국립국악원 무용단, 국립무용단 등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무용단을 수십년 이끌었다. ‘한국 창작무용의 살아 있는 역사’라는 수식이 과장이 아닌 무용가 배정혜 최근작을 감상할 수 있는 무대가 열린다. 2018년부터 예술감독을 맡아온 리틀엔젤스예술단 기획공연 ‘천사들의 비상’이다.
77년째를 맞은 무용 인생을 마무리하는 심경으로 신작 한 편을 포함해 리틀엔젤스에서 그간 만들어온 안무 6편을 한데 모아 1부에서 선보인다. 2부에선 내년에 창단 60년을 바라보는 리틀엔젤스 전통의 레퍼토리 ‘장고춤’, ‘처녀총각’, ‘부채춤’, ‘시집가는날’, ‘북춤’ 등이 무대를 지킨다.
“올해로 리틀엔젤스에 온 지 3년차인데 인생에서 예술작업을 마무리해야 할 때 영입 제안을 받았어요. 돌이켜보면 제가 30대에 선화예고 무용부장을 10년쯤 하면서 제 무용의 사회적 입지도 만들어졌다고 보면 됩니다. 선화예고의 근원이 리틀엔젤스일 텐데 선화예고에서 시작한 제 춤 세계를 리틀엔젤스에서 마무리하고 싶었습니다. 리틀엔젤스에 인생 마지막으로 새로운 안무를 심기 위해 귀환한 거죠.”
천재 무용소녀로 시작한 배 예술감독 춤 인생은 그의 말대로 1974년부터 선화예술고등학교 무용부장으로 재직하면서 양성한 제자들과 함께 창단한 ‘리을무용단’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1986년 국립국악원부터 2011년 국립무용단 예술감독까지 총 25년간 국·공립 무용단체를 이끌어왔다. 우리나라 무용계에서 국립국악원 무용단, 서울시립무용단, 국립무용단 3개 단체 수장을 돌아가며 맡은 경우는 전무하다.
“여러 무대를 만들었지만 나 스스로 어릴 때 무용을 시작했는데 다시 늙어서 어린 무용단을 맡아서 어린 무용수를 위한 작품을 만든다는 게 뭐라 말할 수 없는 감흥을 주고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성인 무용단을 이끌다 리틀엔젤스를 맡게 되면서 느낀 가장 큰 차이점은 순수함이라고 한다. 배 예술감독은 “아이들이 순수하다. 그리고 가르치는 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굉장한 장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초등학교 3∼6학년인 작은반, 중학생으로 이뤄진 큰반 등 어린 학생으로만 구성된 리틀엔젤스라서 생기는 어려움도 많다.
“작품을 하나 하려면 훈련과 안무에 일 년쯤 걸려요. 난관이 뭐냐면 아이들은 자꾸 커서 초등학생이 중학생이 되고, 중학생이 고등학생이 되어서 가르쳐서 할 만하면 졸업해 새 아이를 가르쳐야 하죠. 새로운 작품을 많이 심을 수 없는 조건입니다. 굉장히 어려운 여건인데도 리틀엔젤스가 60년을 이어왔다는 건 그만큼 재단이 애착을 갖고 지원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무대를 준비하면서도 배 예술감독은 “혼자 울기도 많이 울었다”고 한다. 신작으로 두 작품을 준비했는데 하나는 원하는 수준까지 올라오지 않아 포기했다. “직업무용단에서 안무를 짤 때는 한 달이면 끝냈는데 여기선 두 달이 지나도 그렇게 안 됐어요. 그만큼 아이들에게 맞는 작품 만든다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라는 쓴맛을 뒤늦게 단단히 봤어요. 하하하.”
사실 이번 무대는 내년에 열릴 리틀엔젤스 창단 60주년 기념 공연을 위한 전초전 성격이 크다. ‘친선과 우정의 외교사절’로서 오랜 역사를 쌓아 온 리틀엔젤스예술단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100년을 바라보는 미래를 한데 담은 큰 무대를 세종문화회관에서 보여줄 계획이다. 이를 위해 리틀엔젤스 출신이기도 한 사물놀이 김덕수 명인 지도로 작은 반 아이 30∼40명이 앉아서 장구치는 춤을 이미 맹훈련 중이다.
배 예술감독은 “리틀엔젤스가 쌓은 역사가 오랜 만큼 변해야 한다는 건 기정사실이다. 현존 레퍼토리가 오랜 세월을 이겨낸 잘된 작품이 남은 것처럼 새 작품도 리틀엔젤스 역사에 새겨질 수 있을지는 세월이 답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배 예술감독이 한국 무용에 남긴 큰 자산은 무용 훈련법인 ‘바(Bar)기본’이다. 리을무용단에서 1975년 확립한 독자적 무용 방법론과 전통춤 호흡인데 한국춤의 체계를 만들고 현대화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리틀엔젤스 단원들도 이제 바기본을 익히고 있다. 배 예술감독은 “큰반에 바기본을 가르쳐서인지 춤이 엄청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 친구들이 어른되어 ‘내가 중학생 때 배정혜에게 바기본을 배웠다’고 그런 추억담을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도 무대 막이 열릴 때 죽을 것처럼 떨리고, 공연 전에는 밥도 못 먹겠어요. 항상 초심인데 이런 떨림 속에 일생을 마칠 것 같아요. 내 또래 다른 이들은 안 그런데 나만 유독 그러네요. 지금까지 쌓은 게 필요가 없어요. 항상 처음인 듯 70여년을 이렇게 해왔네요.”
리틀엔젤스예술단 기획공연 ‘천사들의 비상’, 서울 유니버설아트센터에서 6월 26일 오후 2시, 6시.
박성준 기자 alex@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