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의 첫 공식 외교사절단은 1867년 3월 미국과 유럽 순방길에 올랐다. 청은 미국인 앤선 벌링게임을 흠차대신(전권대신)으로 임명했다. 외국인이었지만 중국에 외교 전문가가 부족한 상황에서 중국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적을 이용하여 다른 적을 제어함) 전략사고가 유효했다. 부단장 역시 영국인 세무사 존 맥클리비 브라운(柏卓安)과 프랑스 세무사 데샹 등이 포함됐다. 훗날 브라운은 백탁안의 이름으로 1893년에 조선 총세무사로, 이듬해 탁지부(조선말 재무행정 담당 중앙관청)의 고문에 부임한 인연이 있다.
청나라의 외교사절단 파견 결정에 벌링게임의 설득력이 주효했다. 1858년의 ‘톈진조약’이 요구한 외교관 교환과 공관 개설 등의 의무 때문만은 아니었다. 1868년에 동 조약의 개정이 임박했다. 그는 청나라가 서방세계와 외교에 대한 이해력을 향상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고, 이를 총리아문 대신 동순(董恂)이 1865년 3월에 수용했다.
이밖에 벌링게임은 청나라가 더 이상의 불평등한 조약을 체결해서는 안 된다는 충정어린 조언이 통했다. 청나라가 이제 무력이나 불공정한 수단에 굴복하는 것을 막고 외국 정부와 동등하게 직접 교섭에 나서는 것을 사절단의 당위적 목적으로 제시했다. 가령, 중국 주권과 관련해 외국인의 치외법권의 적용범위를 축소하는 것이었다. 사절단은 1867년 2월에 출발해 미국, 영국, 프랑스, 프러시아, 북독일연방과 러시아 등을 순방하고 1870년 2월에 귀국했다.
오늘날 일각에서는 청나라의 ‘첫’ 해외사절단으로 1866년에 유럽 11개국을 유람한 빈춘(斌椿)사절단이라고 주장한다. 빈춘이 영국 버킹엄 궁전, 빅토리아 여왕과 러시아 총리를 예방한 첫 중국인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허나 이 사절단은 성격상 외교사절단 개념에 부합하지 않았다. 일단 ‘어명’이 없었기에 어명의 흠차대신도 부재했다. 또한 사절단의 목적은 동문관 인재들의 식견을 넓히는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