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 전쟁통이야. 온 가족 다 동원해서 책 빼러 다니고 있어요.”
지난 17일 오전 11시 최종 부도를 맞은 대형서점 반디앤루니스의 여의도신영증권점. ‘영업종료’라고 써 붙인 출입금지 라인 앞에 각지에서 몰려온 출판사 직원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출판사를 운영하는 이모(64)씨는 “개점시간(오전 10시) 한참 전부터 와 있었다”며 “어제 부도 사실을 듣자마자 (우리) 책을 빼내려고 달려왔다”고 말했다. 다른 출판사 직원 유모(47)씨는 “서점 직원이 와야 책을 빼든지 할 텐데…”라며 발만 동동 굴렀다.
문제는 서점이 부도나면 그 피해를 출판사들이 고스란히 떠안는다는 것이다. 은행 등 채권자들이 서점의 ‘자산’인 책들을 압류하면 출판사들은 무상 위탁한 책들을 속절없이 뺏기기 때문이다. 결국 돈을 주고 자사 책을 되사올 수밖에 없다. 출판계의 오래된 병폐다.
독특한 ‘위탁거래’ 방식은 서점과 출판사 간 규모의 ‘불균형’에서 비롯됐다. 한국서점조합연합회 자료에 따르면 2019년 국내 서점은 총 1976개다. 같은 해 출판사는 매출 실적이 있는 곳만 3466개, 문화체육관광부 신고업체로 따지면 4만8243개다. ‘2020년 출판시장 통계’(대한출판문화협회)에 따르면 작년 한 해 협회를 통해 납본된 신간 도서만 6만5792종에 달한다.
김기중 삼일문고 대표는 “하루 200∼300종이 출간되는데 대형서점이 아닌 일반서점에서 받을 수 있는 책은 하루 1∼20종에 불과하다. 결국 서점에 깔리지 못한 180종은 독자들에게 노출조차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
이렇게 책은 넘쳐 나는데 서점 수는 적다 보니 출판사들이 책을 무상으로라도 맡기는 것이다. 특히 영세 출판사에게 오프라인 서점은 책을 팔 수 있는 유일한 통로나 다름없다. 온라인·대형서점은 필수적으로 지출해야 하는 광고비를 감당하기 힘들고 자체 마케팅은 더욱 어렵다.
서점 입장에선 처음부터 많은 책을 매입하려면 부담이 크고, 책이 안 팔릴 경우 꼼짝없이 그 손해를 감당해야 한다. 따라서 위탁거래는 서점도 살리고 영세 출판사도 살리는 ‘상부상조’ 측면이 있다.
반면 치명적인 단점도 있다. 위탁한 책들이 언제 팔린다는 보장이 없다 보니 서점으로부터 판매대금을 받기까지 시간이 소요되는데, 영세 출판사는 당장 인건비 등 현금이 필요하다. 그래서 ‘어음 발행’이라는 출판계의 폐단이 등장했다. 서점이 약속어음을 발행하면 출판사가 무상공급한 책은 서점의 자산이 된다. 이런 상황에서 반디앤루니스처럼 부도가 나면 출판사에게 남는 건 부도어음뿐이다.
출판 전문가들은 장·단점이 모두 공존하는 위탁거래를 유지하되, 부도로 인한 영세 출판사들의 피해는 정부지원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장은수 출판평론가는 “위탁이 아예 사라지면 마케팅 능력 없는 영세 출판사들은 책을 팔 공간이 아예 사라진다”며 “위탁을 유지하되 서점이 부도나면 출판사의 피해금액 정도는 출판기금 등으로 보증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이지안 기자 easy@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