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철에 접어들면서 제주도를 향한 발걸음도 부쩍 많아지고 있다.
제주도는 싱싱한 해산물과 함께 돼지고기가 단연 인기다.
여행 중 꼭 한 끼 이상은 제주 돼지고기로 채워야 제대로 여행한 느낌이다.
제주에서 시작해 서울로 진출한 유명 돼지고기 전문점도 많다.
김새봄의 열두 번째 먹킷리스트는 현지인들이 애정하는 제주 돼지고기 맛집이다.
# 들어는 봤나, 생대패오겹살
진짜 고수는 쌈에 고기를 싸먹지 않는다. 고기에 쌈을 싸 먹는다. 공항 근처 제주 연동의 한 골목. 한밤중에도 수십m 밖에서부터 편안한 차림의 주민들이 북적인다. 눈에 띄는 보색대비가 강렬한 첫인상을 풍기는 특이한 간판의 이서림 연동점. 이서림은 본점이 따로 있고 연동에 분점이 있다. 본점은 어머니가, 분점은 아들이 운영하는 가족 식당이다. 두 곳 메뉴는 비슷한 듯 조금 다른데 본점은 흑돼지 숯불구이, 분점은 생대패 오겹살이 메인이다. 이 중 아들이 운영하는 분점이 ‘청출어람’이다. 과거 유도선수로 활약한 출신 성분을 한껏 살린 ‘힘으로 썬 생대패오겹살’이 히트작이다.
냉동한 고기는 기계로 쉽게 썰리기 때문에 냉동 대패삼겹살 파는 음식점은 즐비하다. 하지만 생고기는 썰기 어려워 생대패삼겹살은 이곳에서만 구경할 수 있다. 테이블을 한가득 차지하는 왕돌판에 얇게 썬 생오겹살과 김치를 굽는다. 이미 이대로 100점짜리지만 고사리, 콩나물, 김치, 무생채를 함께 굽고 심지어 푹 익어 고소한 냄새 솔솔 풍기는 갓김치까지도 구워줘 200점을 달성한다. 바삭하게 튀기듯 구운 얇은 생오겹에 고기 기름에 고소하게 익은 고사리, 콩나물, 갓김치를 김밥처럼 돌돌 말아 한쌈 싸 먹으면 익숙한 듯 새로운, 중독적인 고기쌈이 탄생한다. 하루의 시름이 다 잊히는 환상적인 맛이다.
# 인생 수육에 등극한 돔베고기
김이 모락모락 나며 등장하는 도마 위의 고기는 거침없이 큼지막하게 숭덩숭덩 썰려 구수한 비주얼을 자랑한다. 야들야들 윤기 있게 반짝이는 비계 부분에 소금을 살포시 얹어 주면 금세 촉촉하게 녹아든다. 반쯤 녹았을 때 한입에 쏙 넣으면 고기가 얼마나 부드러운지 그야말로 ‘사르르’ 녹아서 없어지는 기분을 솜사탕 이후 오랜만에 경험해본다. 비계는 가볍게 쫄깃하다. 씹는 즐거움이 반 이상 다가올 즈음, 고기 지방에서 올라오는 감칠맛은 여운이 아주 길다. 잡내는 전혀 없으면서 돼지 자체의 모든 면모를 나타내는 풍부함이 심금을 울린다. 올해 경험한 최고의 수육이라 말하고 싶다.
제주 향토음식인 돼지고기 산적도 한번쯤 맛볼 만하다. 제주의 산적은 살코기와 비계를 분리해 꽂는 것이 특징이다. 제주 사람들의 ‘비계 사랑’을 단적으로 볼 수 있는 예다. 분리된 비계와 살코기는 파와 번갈아 꽂아 접시에 낸다. 비계에서 전해지는 사각거림이 대파의 향긋함과 잘 어우러진다.
# 중독성 강한 가브리살
돼지고기에서 얼마 나오지 않는 특수부위인 가브리살을 전문으로 하는 ‘연정식당’. 주문 시작과 함께 손발이 착착 맞으며 빠르게 진행되는 서비스는 연정식당의 평상시 인기를 실감하게 해준다. 빠르게 상에 올라오는 산미가 가득한 김장김치와 파김치, 연근조림 등 직접 만들어 나오는 훌륭한 밑반찬은 동네 인심을 얻기에 충분하다.
가브리살이 나오면 거칠고 투박한 불판에 분무기로 물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쓱쓱 뿌려준다. 고백하건데 너무 맛있게 먹은 지인들과는 ‘불판에 마약을 바르는 것 아니냐’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그만큼 맛있고, 뒤돌아서면 생각나는 매력이 상당하다는 이야기다.
불에서 가장 먼 쪽을 중심으로 고기를 두 줄로 세우고 가운데에는 마늘로 선을 긋는다. 그리고는 굵은 소금을 톡톡 뿌려준다. 고기 가운데가 살포시 올라오며 야트막한 아치형이 되면 더 이상 기다리지 않고 속도 있게 뒤집고, 잘라서 각 면을 얼른 익혀 손님에게 나눠준다. 고기에 불맛을 입힐 정도로 강하게 익히기보다는 촉촉하고 부드럽게 익히는 것을 미덕으로 삼기 때문이다. 식당 이모가 익혀주는 상태 그대로 입에 직행하면 부드러운 육즙이 입 전체를 한 바퀴 여행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씹을수록 고소하다.
# 고기에 진심인 고기박사의 작품, 뼈갈비
도민맛집으로 현지인들이 알음알음 가던 한림의 ‘육고깃집’은 이제 웨이팅이 1∼2시간에 이르는 인기 식당. 육고깃집은 갈빗대를 풍부하게 정형해 칼집을 내서 구운 ‘뼈갈비’가 유명한 곳이다. 유명세만큼 주인장의 예민한 모습 또한 자주 언급된다. 추가주문이 불가능하고, 주인장이 초벌을 끝내기 전까지 손님이 절대 먼저 손대면 안 되는 등의 시스템 때문이다. 이는 가장 맛있는 타이밍의 고기를 위해 굽는 과정에서 손님들의 손길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다.
고기는 주문과 동시에 정형을 시작한다. 그릴 사이로 고기 기름을 톡톡 떨어트려 강한 불에 태우듯 굽고, 40초마다 뒤집어준다. 갈비에 낸 칼집 사이로 뼛속까지 불맛이 전해진다. 촉촉함과 불맛, 육향, 뼈를 집고 뜯는 맛이 상당하다. 모든 절차 하나하나에 까다로운 만큼 고기맛 만큼은 확실하게 보장된다.
반찬은 콩나물과 깻잎, 단무지 무침 정도로 아주 심플한 편인 가운데, 별거 아닌 것 같은 단무지가 아주 요물이다. 특제 양념을 김치 담그듯 넉넉히 무쳐놨는데 고기와 곁들이기 정말 좋다. 불맛 가득, 한입을 채우는 큰 포션의 고기에 진한 양념에 무친 단무지 한 조각은 궁합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
김새봄 푸드칼럼니스트 spring586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