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법을 반영한 것을 포함한 금속활자 1600여 점,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물시계, 해시계의 일부, 동종과 총통까지…. 29일 공개된 서울 공평구역 내 유적 출토품은 역사적 가치가 막대한 것은 물론 종류도 다양해 눈길을 끈다. 하나같이 금속제 유물이라는 점도 주목된다. 발굴 전문가들도 좀체 보기 힘들다는 이런 방식의 매장은 누가 한 것이며, 왜 그랬을까.
발굴 상황을 접한 전문가들은 출토품들이 재활용을 염두에 두고 묻었던 것이라고 추측한다. 활자, 시계 등을 만든 동은 조선시대에 비싸고, 귀한 재료인지라 재활용을 해가며 썼다는 것. 출토품 중 덩치가 상대적으로 큰 총통은 적당한 크기로 절단한 흔적이 역력하고, 동종 역시 작은 파편으로 나왔다는 점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1600여 점의 활자는 항아리에 담긴 채 였고, 일부는 불에 녹아 서로 엉겨붙어 있었다. 발굴을 담당한 수도문물연구원 오경택 원장은 “전시에 피난민들이 집에서 사용하던 제기 같은 걸 한꺼번에 묻었던 것이 발견된 적은 있다”며 “이번 출토품들도 재활용을 위해 함께 묻었다가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나 사용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조선전기 금속활자들이 적은 것도 당대의 재활용 습관에서 비롯되는 측면이 크고 한다. 청주시 이승철 학예연구사는 “신왕이 등극하면 선왕의 업적을 정리하고, 자신의 통치철학을 표방하기 위한 책을 편찬해야 해서 새로운 활자를 만들었다”며 “수만 개, 많게는 수십 만개나 되는 활자를 만들려면 금속이 많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전에 쓰던 걸로 새로운 활자를 제작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고 설명했다.
매장 주체에 대한 추정은 쉽지 않은 상황이다. 발굴지역이 이런 출토품들이 나올 만한 곳은 아닌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오 원장은 “관청에서 지은 건물의 터는 아닌 듯하고, 서울 시내에서 당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주택의 일자형 혹은 ㄱ자형 창고로 판단된다”며 “수습한 유물이 일반 민가에서 소유할 만한 물건은 아니라는 점에서 매장주체를 확인하는 건 지금으로선 추후 연구과제로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고 밝혔다.
강구열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