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1년 9월 11일 아침 미국 뉴욕의 한 도로. 주유엔 대표부 2등서기관이던 김효은 현 외교부 기후변화대사는 출근길 승용차 라디오에서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와 충돌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뭔 말인가 하는데 차창 너머 멀리 뭉게뭉게 솟아오르는 검은 연기가 보였다. 훗날 자전 에세이에서 김 대사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비행기가 부딪칠 때만 해도 ‘미국이 공격받고 있다(under attack)’고 나왔던 CNN 자막이 어느새 ‘미국은 전쟁 중이다(on war)’라고 섬뜩한 뉘앙스로 바뀌어 있었다. 아울러 테러리스트들의 다음 표적이 유엔 본부일 것이라는 추측성 보도까지 나왔다.”
#2. 한국인 다수는 2001년 9월 12일 조간신문에서 9·11을 접했다. 주한미군 경계태세가 최고 단계로 올라갔다. 당시 오산공군기지에서 복무하던 기자는 그날 부대 출입문 앞에 길게 늘어선 차량 행렬을 잊지 못한다. 모든 자동차는 폭발물 감지기까지 동원해 10분가량 걸리는 수색을 받았다. 기지 바깥엔 경찰도 배치됐다.
미군부대 외곽을 우리 경찰이 지키게 된 계기가 9·11이다. 훗날 어느 경찰청장이 주한미군 사령관과 만난 자리에서 “세계 최강이라는 미군을 보호하는 한국 경찰이 가장 힘이 센 것 아니냐”고 말해 화제가 됐다. 농담이라지만 너무 허황하게 들린다.
#3.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웨스트포인트 육사에 진학하려다 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접었다. 2차대전 참전용사인 부친은 전쟁의 끔찍함을 들어 아들을 말렸다. 일단 프린스턴대에 들어간 밀리는 ROTC를 거쳐 결국 육군 장교가 된다.
9·11 직후 미군이 ‘테러와의 전쟁’에 돌입하며 그도 아프가니스탄, 이라크에 차례로 파병됐다. 탈레반 소탕과 바그다드 점령에 큰 공을 세워 2007년 별을 달았고 육군참모총장에까지 올랐다. 2019년 당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밀리를 합참의장에 발탁하며 “자네는 터프가이군. 난 터프가이가 좋아”라고 치켜세웠다.
젊은 시절 목숨 걸고 싸운 아프간을 최근 도로 탈레반한테 빼앗긴 뒤 기자회견장에 선 밀리는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세상에는 제아무리 터프가이라도 해낼 수 없는 일이 있는 법이다.
#4.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던 1960년대 징집 대상이었다. 로스쿨 학업,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입영을 미루다가 병역을 면제받았다. 그의 장남 보 바이든이 34살 늦깎이로 입대해 2008년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 것은 대권을 노리는 아버지의 빈틈을 채우려는 효심의 발로였을 게다. 최근 백악관에서 이라크 총리와 만난 바이든이 “제 아들도 이라크에서 복무했죠”라며 2015년 암으로 숨진 보를 떠올릴 때 그의 목소리엔 물기가 어려 있었다.
바이든은 아프간 철군 정당성을 미군의 희생에서 찾았다. 반대자들을 향해 “알링턴 국립묘지 아프간 전사자 묘역에 늘어선 묘비들을 좀 보라”고 외쳤다. 아프간에서 미군 2400여명, 이라크에서 4500여명이 사망했다. 9·11로 목숨을 잃은 미국인은 3000명이 조금 못 된다. 미국은 과연 무엇을 얻은 걸까.
#5. 앞서 소개한 김효은 대사에 관한 후일담이 있다. 9·11 즈음에 유엔 대표부에서 루마니아 대사관으로 발령 난 그는 고민에 빠졌다. 결혼한 지 제법 됐는데 아이가 생기질 않았다. 이대로 부부가 헤어져 지내면 상황은 더 나빠질지 몰랐다. 그런데 9·11로 DJ 방미가 취소되며 예정에 없던 휴가가 주어졌다. 김 대사는 미국 다른 도시에서 유학 중이던 남편과 며칠을 보내고 부쿠레슈티행 비행기에 올랐다. “(루마니아 부임 후) 어느 날 나는 내가 임신했다는 걸 알았다. 세상에 이럴 수가!”
누군가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는 순간에도 세상 어딘가에선 새 생명이 잉태된다. 자라나는 세대가 테러도, 전쟁도 없는 곳에서 살도록 하는 게 어른들의 책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