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지인지 바다인지 알 수 없을 만큼 크루즈는 바다 위에서 고요히 미끌어진다. 크루즈를 품은 물결은 잔잔하기 그지없다. 조금은 빠듯한 기항지 일정을 마치고 서둘러 출항했지만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크루즈 분위기는 차분하다. 혹여 기항지 승선과 하선을 놓칠까 하는 걱정으로 초조한 마음 없이 승객들 모두 온전한 선상에서의 저녁 시간을 보내고 있다. 기항지에서 마주한 승객들 옷차림과는 달리 우아한 드레스와 정장을 갖춰 입은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하루의 경험을 공유하며 대화를 꽃피운다. 라운지에는 칵테일 잔을 든 사람들이 낯선 문화를 접하며 느낀 흥분을 전하는 설렘 가득한 목소리들로 가득하다.
하나 둘 자리를 옮기며 식당으로 향하는데, 평소 붐비던 뷔페식 레스토랑보다 정찬식 레스토랑에 더 많은 승객들이 모여든다. 시간의 여유를 즐기고자 그들과 함께 정찬식 레스토랑 입구에서 안내를 기다린다. 운 좋게 창가 테이블에 자리하고 낭만적인 크루즈 분위기를 만끽한다. 정성스럽게 서빙되는 음식을 즐기며 호사를 누리니 승선과 하선으로 지친 크루즈 여행의 피곤함은 기억에서 사라지고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된 듯한 분위기에 스며든다. 와인 한 잔을 더하니 디저트가 나오고 따스한 분위기는 절정을 이룬다. 하루 일과를 마친 해가 드디어 쉼터로 돌아가는 시간! 인사를 전하며 노을로 하늘을 물들이는 장관을 펼친다. 선상 창문은 영화관 사각 스크린이 되고 실시간 변하는 태양의 움직임은 내레이션 없는 영화를 상영한다. 잔잔한 지중해 바다는 태양을 품고 소리 없이 꺼지는 빛을 검붉은 노을이 덮으며 하루가 저문다.
크노소스 궁전! 최초의 문명을 맞이하는 설렘으로 마주한다. 지나온 많은 유적들이 그러했듯이 온전한 모습이 아닌 폐허에 몇몇 건물 흔적만이 조용히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인구 8만여명이 살았던 고대 왕국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초라한 모습을 띤 채 과거의 영광으로 이끈다. 가이드의 설명에 귀 기울이며 신화 속에 등장하는 미노타우루스가 갇혀 있던 곳으로 잠시 시간을 되돌이켜 보기도 하고, 무너진 신전 한쪽 황소의 벽화를 따라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기도 한다. 넓은 왕궁터를 관람 코스 따라 걸음을 옮기며, 내리쬐는 태양을 머리에 이고 역사의 한켠에 비집고 들어선다. 최초의 문명의 장소에서 어릴 적 들었던 신화를 되새기며 지난 시간으로 여행을 떠난다.
열기에 익은 살갗이 벌겋게 달아올 무렵, 크루즈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승선하기 전, 서둘러 박물관은 찾는다. 크레타섬을 대표하는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이다. 한적한 거리에 있는 박물관은 눈에 띄지 않는 초라한 듯한 외관이지만 내부에 들어서니 이보다 더 세련될 수 없다. 차가운 대리석이 피부에 닿은 듯 서늘함이 전해진다. 대리석 벽을 따라 크레타 섬을 설명하는 동영상이 눈에 들어온다. 5000년 역사를 조심스레 담아 신성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 외부에서 봤듯이 규모는 크지 않지만 2층 건물에는 이 지역에서 나온 유적품들로 빼곡하다. BC 3000년, BC 2000년이란 숫자들이 새겨진 유물들을 따라 전시물들을 둘러본다. 체계적이고 편하게 관람할 수 있도록 정리된 유물 하나하나를 바라보니 단순히 오랜된 것 이상의 아름다움이 전해진다. 초라한 듯한 외딴 지역 박물관에서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다. 크레타섬이 주는 역사적인 의미를 조금이나마 접하고 승선하니 크레타 섬에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만나지 못한 아쉬움이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