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연국의 행복한 세상] 생각하지 않는 죄

아돌프 아이히만은 유럽 각지의 유대인들을 폴란드 수용소로 이송하는 최고 책임자였다. 그는 자신이 유대인 500만명을 이송했다고 자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아르헨티나로 도피한 그는 이스라엘 정보기관에 붙잡혀 법정에 섰다.

아이히만은 "당신의 죄를 인정하느냐"는 검사의 심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억울합니다. 저는 남을 해치는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었어요. 그저 제가 맡은 일을 충실히 해냈을 뿐입니다.” 군인인 그는 상부의 명령을 효율적으로 집행하기 위해 수송 열차에 가스실을 설치했다. 수많은 유대인들이 그가 고안한 가스실에서 '효율적으로' 죽음을 맞았다.

검사는 아이히만에게 사형을 구형하면서 “당신의 범죄는 양심에 따라 말하지도, 생각하지도, 행동하지도 않은 것”이라고 꾸짖었다. 당시 재판을 지켜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평범하고 성실한 악인의 모습에 크게 놀랐다. 그는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가 유죄인 이유는 아무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자신에게 맡겨진 유대인 학살이 어떤 의미와 결과를 초래할 것인지를 생각하지 않고 조직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무사유의 죄'이다.

붓다는 깨달음의 전제조건으로 사유 능력을 들었다. 깨달음에 이르고 싶으면 바로 보고(正見) 바로 생각하고(正思) 바로 통찰하라(正念)고 주문했다. 어떤 이가 붓다에게 "모두 자기들의 가르침만이 진리라고 하는데 대체 누가 옳고 누가 그르냐"고 묻자 이렇게 설파했다. "절대적인 힘을 가진 사람이 말했다고 해서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설령 내가 말했다고 해도 진리로 단정짓지 말라. 나의 말도 의심하고 헤아려 보아라. 그것이 이치에 맞는지, 그 주장이 모든 사람들의 무지와 욕망을 제거하고 해탈의 길로 이끌 수 있는지를 먼저 깊이 생각하라. 그러면 나는 그것을 진리라고 승인할 것이다."

철학자 데카르트는 '생각'을 철학의 기초로 삼았고,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다. 인간의 고귀함과 위대성이 사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자신의 행동을 성찰하는 능력은 모든 생명체 중에서 인간만 갖고 있는 특장(特長)이다. 사유의 능력을 지녔기에 인간은 무지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요즘 SNS 시대에 무사유의 언행을 자주 보게 된다. 비방 댓글이나 문자 폭탄으로 남의 인격을 짓밟는 행위는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쳤다고 보기 어렵다. 양심과 정의, 공정에 대한 충분한 숙고 없이 집단으로 부화뇌동하는 행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맹목성이 평범한 사람을 악인으로 만든다. 그것은 분명히 유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