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툭.’
직원이 서빙하다가 빙수 위에 올려진 포도 한 알이 탁자에 떨어졌다. 직원이 “죄송합니다”라며 냅킨으로 포도를 주우려는 순간 말리기 위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지만, 이미 늦었다. ‘놔두세요. 그냥 먹을게요’라는 말을 차마 내뱉지 못하고 속으로 삼켰다. 평소라면 포도 한 알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아...저거 한 알에 3000원인데.’
◆매년 최고가 기록 갈아치우는 호텔가 빙수 경쟁
테이블에 떨어진 포도 한 알마저 아깝게 느껴진 이 빙수의 가격은 9만8000원. 서울 강남구 역삼동에 위치한 조선 팰리스 호텔이 지난 1일 출시한 ‘샤인머스캣 빙수’로, 최근까지 나온 빙수 중 가장 고가다. 서울시내 특급호텔인 서울신라호텔의 뷔페 ‘더 파크뷰’의 가격이 11만9000∼12만9000원인 것을 고려하면 ‘금빙수’라는 말이 나올만도 하다.
올해도 특급호텔을 중심으로 고가 빙수 경쟁이 뜨겁다.
2008년 제주신라호텔이 고가 호텔 빙수의 원조격인 ‘애플망고 빙수’를 3만원 가까운 가격에 내놓으면서 화제가 됐다. 당시 제과점 등 일반 매장 팥빙수는 3000∼7000원 수준으로, 최대 10배 비싼 가격이었다.
신라호텔의 제주 애플망고 빙수는 해마다 가격이 올라 올해는 지난해보다 5000원 비싼 6만4000원이다. 페어몬트 앰배서더 서울이 이보다 비싼 7만5000원짜리 ‘애플망고 빙수’를 선보였고, 시그니엘 서울은 ‘코코넛 망고 빙수’를 6만2000원에 판매하고 있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은 지난해 4만9000원에 팔던 ‘망고망고 빙수’의 주재료를 바꿔 1만9000원 오른 6만8000원에 ‘제주 애플망고 빙수’를 내놓았다.
이처럼 빙수 값이 해마다 뛰어 뷔페 가격에 맞먹게 된 것에 대해 업계 측은 고급·고가 재료를 쓰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조선호텔앤리조트 관계자는 “‘샤인머스캣 빙수’에는 엄선된 샤인머스캣 5송이가 들어간다”고 밝혔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우스갯소리로 ‘빙수 위에 올려진 포도 한 알이 몇천원’이라는 글이 올라오지만, 한 송이만 빙수 위에 올라가고 4송이는 착즙해 슬러시로 제공된다. 신라호텔 관계자도 “애플망고 빙수 한 그릇에 제주산 애플망고가 한 개 반에서 두 개 정도가 들어가는데, 제주산 애플망고 가격이 워낙 비싸서 망고 가격만 4만원이 넘어간다”고 설명했다.
◆비싸도 잘 팔려...‘경험’을 사는 MZ세대
기자가 직접 맛본 ‘샤인머스캣 빙수’는 기대가 너무 큰 탓이었는지 특별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샤인머스켓을 먹어본 사람이 예상할 수 있는 맛과 성인 2명이 적당히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과일의 신선도나 곱게 갈린 빙수 맛은 나무랄데 없지만, ‘빙수를 10만원 가까이 주고 사먹어야 하나? 차라리 뷔페를 먹는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머릿 속을 맴돌았다.
하지만 고가 빙수를 찾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은 듯했다. 조선 팰리스 호텔에서 앞서 6월에 출시한 ‘카라향 빙수’(6만8000원)는 약 한 달간 목표 수량(150개)의 2배 가까이 판매됐다. 포시즌스 호텔 서울측 역시 “최근에 망고 빙수는 계속 준비한 수량이 모두 판매되고 있다”고 밝혔다. 신라호텔 관계자도 “주말에는 (빙수를) 먹으려면 좀 기다려야 한다”고 전했다.
고가 호텔 빙수의 이같은 인기는 경험과 가치를 중시하는 MZ세대(밀레니얼+Z세대)의 취향과 소비성향을 간파한 전략 덕분이다.
이은희 인하대 교수(소비자학과)는 “(고가 빙수는) 일종의 경험소비”라며 “젊은 세대에게는 빙수를 먹는 것뿐만 아니라 호텔의 근사한 분위기를 체험하고, 사진 찍어 온라인에 올리는 과정이 하나의 즐거운 경험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이들은 소비를 단지 상품의 기능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소비를 통해서 그런 ‘스토리’를 체험하고 전하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며 “판단 기준이 빙수‘가’ 어떻더라가 아니라 빙수‘도’ 어떻더라가 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최지혜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젊은층의 소비가 양극화됐다고 표현할 수 있다”며 “MZ세대는 자기가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서는 굉장히 계산적이고 가성비를 따지는 경향이 있지만, 본인이 가치를 두는 것에는 소위 ‘플렉스’(Flex·자신의 소비를 과시하는 모습)를 하듯이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그는 “호텔에서 ‘호캉스’도 하고 싶고 럭셔리한 라이프를 누려보고 싶은데, 그러긴 어려우니까 호텔 빙수를 먹는 것으로 대리만족하는 경향도 있다”고 덧붙였다.
직장인 최모(25)씨는 호텔에서 빙수를 사 먹는 이유로 “명품 가방 같은 비싼 물건을 사려면 많은 돈이 필요한데, 기분 전환 겸 크지 않은 돈으로 사치를 부릴 수 있어서”라고 답했다. 직장인 문모(25)씨도 “특별한 날,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고려해볼 것 같다”면서 “빙수의 맛과 호텔 인지도, 분위기 등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고가 빙수는 마케팅 전략...MZ세대로 4050세대도 ‘낚아’
고가 빙수를 찾는 젊은이들에게 ‘말도 안 되는 가격의 빙수를 사 먹어서 호텔들 배만 불린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업계에서는 빙수의 수익성이 높지 않다고 말한다.
신라호텔 관계자는 “재룟값이 비싸서 사실 빙수는 수익이 많이 나는 상품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호텔의 주 이용객이 아닌 MZ세대를 대상으로 상품을 출시하는 것도 매출에는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호텔업계에서 고가 빙수 경쟁이 식지 않는 건 홍보 효과 때문이다. 업계는 고가 빙수를 엔트리(입문) 상품으로 본다. 젊은층이 호텔에 빙수를 먹으러 왔다가 이후 식당이나 숙박 상품을 이용하기 위해 재방문할 수 있고, 호텔 이용자가 중장년층에서 젊은층까지 다양해진다는 것이다.
비싼 음식을 한정판매하는 것은 명품 브랜드들의 고가 핸드백 판매 전략과 비슷하다.
이은희 교수는 “다른 사람한테 자기가 경험한 걸 과시하고 인정받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아무나 못 오고, 아무나 못 사는 상품의 가치는 더 높아진다”며 “나하고 다른 사람을 차별화할 수 있는 하나의 요인이기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MZ세대를 겨냥한 상품이 4050세대에도 영향을 준다고 말한다. 최지혜 연구위원은 “우리가 지금 MZ세대가 고급 빙수를 찾는 이유를 분석하듯이 MZ세대가 뭔가를 먹었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관해 얘기를 한다, 즉 화제가 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기성세대들은 젊은 사람들이 쓰는 제품을 따라 쓰고 싶어하는 욕구가 있다”며 “젊어지고 싶은 욕구가 있듯이 젊은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따라 하고 싶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반대로 4050세대의 소비를 2030세대가 따라 하고 싶을지 생각해본다면, 아니라는 답이 나온다”면서 “딸이 쓰는 화장품을 엄마는 쓰고 싶어하지만, 엄마가 쓰는 화장품을 딸이 쓰고 싶어하진 않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