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포럼] 국가는 왜 존재하는가

청해부대원 301명 ‘쓸쓸한 귀환’
군 당국 허술한 대응 피해 키워
사과 대신 軍 질책한 文대통령
자신을 낮추고 국민부터 챙겨야

그제 오후 성남 서울공항. 공군 수송기에서 청해부대 34진 문무대왕함 승조원들이 들것에 실리거나 의료진의 부축을 받으며 차례차례 트랩을 내려왔다.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인해 금의환향도 모자랄 이들의 ‘쓸쓸한 귀환’이다. 풀이 죽은 채 국군수도병원, 대전병원 등으로 흩어지는 모습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억장이 무너진다.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 후예인 이들의 죄(?)라면 국가의 부름에 응한 것뿐이다. 묵묵히 임무를 수행해온 그들에게 경의의 박수를 보낸다.

청해부대. 우리 군의 첫 전투함 파병부대다. 2009년 3월 ‘국군부대의 소말리아 해역 파병 동의안’ 가결로 창설됐다. 해군의 해양 수호 의지를 상징하기 위해 해상무역으로 통일신라를 부흥시킨 ‘청해진’에서 따온 명칭이다. 위용도 막강하다. 4500t급 문무대왕함. ‘충무공이순신급’ 군함으로 분류되는 문무대왕함은 한국형 구축함(KDX1) 1번함인 3500t급 ‘광개토대왕함’보다 1000t이나 크다. 대함, 대공, 대잠, 대지 및 전자전 수행도 가능한 한국 최초 스텔스 구축함이다.

김기동 논설위원

그들의 발목을 잡은 건 작전이 아닌 감염병이었다. 창군 이래 처음으로 파병부대의 ‘앰뷸런스 귀환’이라는 상황까지 내몰렸다. 인재(人災)다. 최초 의심 증상자 발생 후 확진 판정까지 열흘이 넘도록 군의 대응은 허술하기 짝이 없었다. 백신도 없이 장병들을 사지로 내몰고도 군은 “당시 백신이 없었다”는 변명으로 일관했다. 접종 후 이상반응 대처도 어려웠다고 발뺌한다. 신속·정확도가 높은 항원검사키트 대신 항체검사키트를 보내놓고 ‘요행’에 기댄 것 자체가 무모했다.



돌발변수에 대비한 플랜B는 아예 없었다. 미국은 백신 최초 접종부터 군인을 1순위 대상으로 지정했다. 미국은 주한미군에게 백신을 제공했다. 자국군은 물론 현지 군무원까지 살뜰히 챙겼다. 파병결의안 가결 당시 청해부대는 바레인의 미 주도 연합해군사령부와 공조하도록 했다. 이를 외면했건 몰랐건 간에 명백한 군의 잘못이다. 아랍에미리트 아크부대와 남수단 한빛부대가 유엔과 파견국의 협조로 백신을 맞은 건 어떻게 설명하려는가. 군과 방역당국 간 책임 떠넘기기는 가관이다. 39~40도 고열에도 감기약과 해열제 1∼2알로 버틴 아들을 둔 부모는 피눈물을 흘린다. 국가가 역할을 못하니 “청해부대가 화성으로 떠났나” “K방역의 K가 킬링(Killing)이냐”는 조롱이 빗발친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분명하다. 헌법 제2장 10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고, 피해를 당한 국민을 보호하고 구조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이번 일은 세계 6위 군사강국의 자부심과 군 사기에 큰 상처를 줬다. 그런데도 감염병 경계에 실패하고도 책임지는 이가 없다. 총리·국방부 장관의 사과 한마디로 끝낼 일이 아니다.

대통령은 유체이탈 화법으로 일관한다. 헌법 74조1항에 따르면 대통령은 군통수권자다. 막강한 권한을 가진 만큼 책임도 지라는 의미다. 문재인 대통령은 “군이 나름대로 대응했지만 국민의 눈에는 부족하고 안이하게 대처했다는 지적을 면하기 어렵다”고 했다. 사과 대신 군을 질책하는 신기(神技)다.

영국 첫 여성총리 마거릿 대처. 1982년 두 달에 걸친 포클랜드 전쟁에서 250여명의 사상자가 나오자 여름휴가를 반납한 채 일일이 희생자 가정에 손편지를 썼다. 총리 이전에 어머니이자 아내의 심정으로 편지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지난해 9월 서해상에서 사살된 해양수산부 공무원의 아들에게 보낸 문 대통령의 ‘타이핑 편지’가 오버랩된다.

일본 크루즈선에 갇혀 있던 국민을 데려오기 위해 대통령 전용기를 보내고, 청해부대원 후송을 위해 ‘오아이스 작전’이라며 호들갑을 떨 때가 아니다. 불과 보름 전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어선 데 대해 “자부심을 가져달라”던 문 대통령의 말이 궁색하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수유칠덕(水有七德). 물이 가진 일곱 가지 덕목 중 으뜸은 ‘겸손’이다. 물이 낮은 곳으로 흐르듯 자신을 낮추고 국민을 섬기는 지도자가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