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의 적' 정지아 “사는 거이 맘대로 된다디야, 그럼에도 살아온 만큼, 살아내는 만큼” [김용출의 문학삼매경]

마치 무대의 막이 짠, 하고 올라가면 산전수전을 다 겪은 듯한 변사가 나와 걸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았다. 가령 구어적이고 비어가 출몰하는 다음 대목이 특히 그렇다. “각설하고, 시작하겠다. 다만 한 가지 양해를 구한다. 자폐가족 이야기는 황당하지만 흥미진진하지는 않다.”(10쪽) “그러니 독자 여러분도 자식놈이 스펙 운운하며 어학연수 보내달라고 떼를 쓰거나, 후배에게 승진이 밀렸거나, 마누라 친구의 잘난 남편과 비교당했거나, 이러저러하여 사는 게 엿 같을 때, 자폐가족을 떠올려주기 바란다.”(44쪽)

 

말투 역시 여간 능청스러운 게 아니었다. 엿 같을 때, 라니. 더구나 진지해 보이는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유머러스한 아이러니라니. 가령 다음 구절을 읽고도 픽픽, 웃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지식인은 개뿔. 참고로 말하면….”(25쪽) “현남의 가족은 아들 둘을 포함, 모두가 이 지경으로 정직하다. 이 정도의 정직은 이 지경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다.”(29쪽)

 

표제작 「자본주의의 적」에서 한참을 키득키득, 웃다가 다음 단편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으로 넘어갔는데, 아니 글쎄, 첫 문장부터 포획돼 버렸다. “좆됐다. 문학박사 정지아는 전화를 끊으며 자신도 모르게 입 밖으로 중얼거렸다.”(46쪽)

 

첫 문장이 무려 좆됐다, 라니. 작가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 분명 정지아 작가였다. 남로당 전남도당 간부였던 아버지 정운창(작고)씨와 ‘남부군’ 정치지도원이었던 어머니 이옥남씨의 삶을 그린 『빨치산의 딸』을 쓴, 이름을 지리산의 ‘지’와 백아산의 ‘아’에서 따왔다는.

 

이미 타이트하게 정해진 일정과 업무가 이어지면서 그의 소설을 더 이상 읽지 못했고, 무심한 시간 속에 그 역시 잊혀졌다. 그러다가 여름휴가를 다녀온 뒤 그의 소설이 불현듯 떠올랐고, 그의 소설 세계를 만나보고 싶었다.

 

인터뷰 약속을 잡고 밀린 숙제하듯 소설을 읽어나갔다. 그의 작품 세계에 들어가자, 처음 그의 소설집으로 안내한, 구어적이고 능청스럽고 유머러스한 문장들의 근원에는 인간에 대한 어떤 따뜻하고 예의바른 시선이 자리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어떻게, 아니 왜 인간을 따스하게 바라보게 된 것일까.

 

날이 푹푹 찌던 지난달 23일 이른 아침, 서울남부터미널에서 버스를 잡아타고 백운산 자락의 구례 간전면 무수내로 내려갔다. 백일홍이 피어있는 나무 그늘 아래에서 사진을 찍은 뒤 8년 만에 네 번째 소설집 『자본주의의 적』(창비)를 펴낸 정 작가와 마주 앉았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개와 고양이 무리를 헤치고.

 

표제작인 「자본주의의 적」은 어디에서도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특별한 욕망이 없는 화자의 대학 친구 ‘현남’의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풀어낸다. 욕망에 포획돼, 아니 욕망을 노골적으로 내세우며 가상화폐와 부동산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에게 똥침을 놓는다.

 

―재밌게 읽었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실제 이런 사람이 있을까.

 

“제 친구 얘기이긴 한데, 디테일은 실제와 다르다. 삶의 자세라든가 시험지 사건 등은 사실이지만, 나머지 많은 곳에서 과장되거나 가공됐다. 오래된, 절친한 친구인데, 원래 재밌다. 처음에는 글 쓸 생각을 못했다. 민사고 출신 제자들과 자본주의 미래 등에 대해 이야기하며 분배 문제가 세계적인 화두로 등장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를 나눴다. 욕망이라는 것이 끝이 없는데, 사회주의도 욕망을 강제로 컨트롤하려다가 실패한 것 아닌가. 욕망이 없는 친구가 있어 써보면 좋겠다고 생각해 가볍게 시작한 것이었다. 이들은 사실 자본주의의 적이라고 할 수 없다. 개별적인 성향일 뿐이라서 대안이 될 수 없다. 그래도 자본주의의 욕망을 고민하고 생각하게 하는 계기는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에서 쓰게 됐다.(마음을 풀어놓고 쓴 느낌이 들더라) 제일 편하게 쓴 것 같다.”

 

다음 소설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은 한 중앙일간지 기자가 화자의 텃밭을 취재하러 오면서 송씨 아주머니를 부르는 등 벌어지는 갖가지 소동을 그린 코미디다. 작품은 몇 년 간 그의 집을 찾는 손님들을 웃기게 한 나무 팻말 이야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그러니까, 소설처럼 정 작가와 밤늦도록 술을 마셨던 영화PD가 ‘문학박사 정지아의 집’이라고 적은 팻말을 만들어 문 앞에 놔두고 갔다. 그는 한 판화가에게 농담으로 이를 얘기했는데, 그 판화가가 멋진 나무에 글자를 새겨 보내왔다. 농담을 진지로 받으면 어떻게 하느냐고 그가 난감해 하고 있을 때, 마침 민사고 출신 제자 변호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진지를 다시 유머로 바꾸는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고, 제자는 개집에 걸라고 했다. 개집에 걸려고 했지만 플라스틱 개집은 무거운 나무를 버티지 못하고 넘어졌다. 개집에 거는 것도 실패하고 나무 팻말을 집 한구석에 숨겨줬는데,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한동안 손님들이 박사님, 하고 놀리는 유머 소재가 됐다나 어쨌다나.

 

―따뜻한 시각의 코미디다.

 

“웃긴 (나무 팻말)이야기로부터 시작됐지만, 그 에피소드를 빼고 나머지는 모두 허구다. 한동안 제 손님들에게 유머를 주는 코드 중 하나였다.(이야기를 하면서 정 작가가 손을 가르쳐서 고개를 돌려보니, 맙소사, 거실 기둥에 나무 팻말이 떡, 하니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어떤 기자는 작품 속에 나오는 소확행 기사가 진짜인 줄 알고 검색을 시도했다고 하더라. 그런 일 없다. 작품에선 모두 나이 먹은 사람들뿐이지만, 실제로 주인집만 빼고 거의 젊은 사람들이다. 송씨 아주머니 역시 없고.”

―“샌드 페블즈도 아니면서 박은 나 어떡해, 통화하는 내내 울먹였다”(53쪽)며 페이스북을 둘러싼 문제가 나오는데.

 

“페이스북은 진짜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어떤 이미지화된 모습을 올리는 것인데, 인기도 생겨나지만 끊임없이 구설에 오르기도 한다. 알려지고자 하는 욕망,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 안 그런 척 하지만, 저도 있다. 제가 여기에 와서 갱년기가 시작됐다. 평소 감정기복이 거의 없는데, 몇 년 지난 뒤 갑자기 우울해지더라. 서울에서 멀어지고, 페미니즘이 창궐해 그런 글을 쓰라고 하는데 백 퍼센트 동의도 안되고, 시골로 오니까 밀려나나, 바람만 불어도 쓸쓸한 바람이 부네, 이런 생각이 들더라. 나에게도 당연히 알려지고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구나, 하고 깨닫고 있다. 한편으론 사실이 아닌 것으로 인정받으려는 태도에 대해 우리 모두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다. 내 마음의 이중성과 페이스북이 가진 허위 두 가지를 모두 깔 수 있는 방법은 저를 희화화하고 조롱하는 방법밖에 없겠다 싶어 저를 전면에 등장시킨 것이다. 하지만 작품 속의 저의 모습이 전부 저는 아니다(웃음).”

 

―친근한 구어와 구수한 향토어도 많이 나와 인상적이다.

 

“(향토어를 잘 구사하는) 이문구 선생을 좋아한다.(본래 말을 재밌게 하느냐, 아니면 작품을 위해 극화한 것인지) 극대화한 것이다. 특히 ‘그분’을 만나면 말을 않고, 가만히 있다(웃음). 조금 너스레를 떨어본 것이다.(좆됐다는 말, 자주 하느냐) 가끔 술 먹으면 하는 것 같다. 생각해보면 제 대학 은사들이 40대였는데, 그 당시엔 노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애들이 저를 보면 그럴 것 아니냐. 학교에서 강의할 때 이런 말을 쓰면 아이들이 대개 좋아하고 확 친해진다. 의도적으로 쓸 때가 있다.”

 

단편 「검은 방」은 99세의 노모가 검은 방에서 과거의 기억과 부모와 남편, 딸 등을 소환하고 화해하는 이야기다. ‘남부군’ 정치지도원으로 1948년 말부터 1954년 초까지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한 어머니 이야기가 모티브로, 작가의 원점이 담긴 소설쯤 되겠다.

 

―소설은 실화인가.

 

“저의 옛날 소설에 가까운 작품 같다. 대부분 실화인데, 허구적 요소도 많이 섞여 있다. 엄마의 삶을 관통하는 팩트 몇 개에 나머지 3분의 2는 가짜를 집어넣었다. 이를테면 엄마가 이현상부대에 있었다거나 가회전투에서 박종하가 죽어 수의를 짓는 모습 등은 사실인데, 엄마가 치매에 걸려 약 먹고 죽으려 하거나 이모 이야기 등은 사실이 아니다. 지금도 엄마가 방에서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지만 저를 제외한 부문은 상상한 것들이다.”

 

어머니의 삶은 시대와 사랑, 가족에 따라 크게 굽이쳤다. “그때는 그녀에게도 세상이 명료했다. 목숨 바쳐 싸우면 더 좋은 세상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세상의 밖으로 하염없이 밀려나는 기분, 모래사장의 한알 모래가 된 기분, 산을 내려온 이래 늘 그런 기분으로 살았다. 딸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딸은 전에 그녀가 본 세상보다 한없이 작고 사소하지만, 그녀에게는 전부인 우주였다.”(103쪽)

 

―어머니 건강은 어떠신지.

 

“오래 전, 척추협착증이 심해 통증을 없애는 시술을 받았다. 걸어 다닐 수는 있는데, 보통 집안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 2, 3년 동안은 마당에도 나오고 제 집에 와서 식사도 했는데, 점점 나오는 횟수가 줄었다. 늙은 모습을 사람에게 보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이미 죽었어야 할 존재로 각인하고 계신다. 제가 밥을 준비해 오전 10시와 오후 6시 반 두 끼를 함께 한다. 엄마가 밥을 천천히 먹어서 1시간 정도 이야기하고, 여름 같으면 에어컨을 켜지 않아서 중간중간 가서 에어컨을 켜주곤 한다.”

 

다른 단편과 달리 이 작품에선 유머가 없더라.

 

“엄마의 삶 자체가 그래서, 유머가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제가 원래 무거웠다. 현실에선 친한 친구들과 재미있게 수다도 떨기도 하는데, 삶이나 글을 대하는 태도는 마흔 대여섯까지 너무 무겁고 쓸데없이 진지했던 것 같다. 부모의 삶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무거웠다. 엄마는 유머도 있고, 부모의 삶이 꼭 그렇게 무겁지만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그것을 바라보는 제 시각이 고정돼 있고 거리를 두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문제에선 많이 열렸는데, 부모를 바라보는 시선은 아직도 무겁다. 「검은방」은 무거운 것의 마지막이 아닌가 생각한다. 제 자신도 마흔이 넘어 제 삶에 뭔가 결여된 것이 많구나, 하는 자각이 오기 시작했다. 사람이 어떻게 진지하게만 살겠느냐, 놀기도 하고 풀어져서 나이트도 가고 그러는 것이지.”

 

김유정문학상 수상작인 「우리는 어디까지 알까」는 알코올 중독으로 인한 ‘섬망 증상’을 겪는 말기 암 환자인 사촌동생 기택이 어느 여름날 화자를 방문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아름답게 그린 소설이다.

 

―소설이 따뜻하다.

 

“큰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의 아들 이야기를 엮은 것으로, 모티브만 사실이고 나머지는 허구이다. 구체적으로 사촌 동생이 조폭에 들어갔다가 나온 장면이나 노동자로 살았던 모습 등은 사실이고, 나머지는 상상을 부풀려 썼다.”

 

“작품에는 쓰지 않았지만,” 하면서 작가는 이 단편이 탄생하게 된 배경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손에 잡힐 듯이. “아마 그 장면 때문에 글을 쓴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정지아의 아이가 다섯 살 때쯤 사촌들이 놀고 있는 고향 마을의 계곡에 갔다. 아이를 인사시키기 위해서였다. 사촌들은 닭고기를 구워먹고 있었다. 그의 아이도 앉아서 닭고기를 너무 맛있게 먹으니, 작은 아버지 아들인 사촌 동생이 기다려보소, 하더니 한여름 땡볕을 뚫고 7, 8분이나 걸어서 닭 한 마리를 잡아왔다. 그가 됐다고 하는데도 기어이. 언니들이 닭을 다 먹고 나서, 뭐 안주 없을까, 하니까 사촌 동생이 다시 기다려보소, 하더니 이번에는 물고기를 잔뜩 잡아왔다. 매운탕을 끓여 먹었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매운탕이 없었다. 게다가 그의 아이가 물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아이를 물로 데리고 가서 한 시간 넘게 물놀이를 해줬다. 그것을 보면서 그는 생각했다.

 

“노동운동도 안해, 노동자 계급의식도 일도 없어, 술만 먹고 다녀, 그래서 대개 한심하게 사촌 동생을 보다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역할은 다른 것 아닌가, 하고 처음으로 사촌 동생을 아름답게 인식했던 것 같다. 사촌 동생이 죽기 1주일 전에 엄마한테 인사하러 왔더라. 술에 취해서 그냥 왔어, 라며 운전해서 왔다. 대신 운전하려고 했는데 괜찮다며 가버렸다. 멀지 않았구나.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이었던가, 자기가 갖고 태어난 성격이나 성향이 있었겠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해 늘 남을 도와주면서 살았던 이런 게 인생 아닌가, 하고 생각해서 쓰게 됐다.”

 

―이번 소설집에서 두드러진 능청이나 유머는 어디에서 온 것인가.

 

“술 먹으면 이런 게 나오긴 하는데(웃음). 생각해보면, 저는 재치 있게 웃기는 스타일은 아니다. 흔히 유머러스하다면 살짝 비틀거나 향토적인 유머일 텐데, 그런 게 없다. 다만 제가 아이들을 웃길 수 있는 건 굉장히 솔직하다는 점일 것이다. 바닥 같은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잘못하고 있는 것들을 과감히 드러내 버린다.”

―소설집 전체적으로 사람을 보는 시선이 참 따뜻한데.

 

“본래부터 이러진 않았다. 옛날에도 휴머니즘이 없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선택적이고 계급적인 휴머니즘이었던 것 같다. 카스테라도 못 먹어본 세상에서 살았기 때문에, 어릴 적부터 가난하고 못배우고 힘들게 사는 사람들의 고통에는 예민하게 열려 있었다. 반면 평균치 또는 가난을 벗어난 사람들에 대해선 경계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생각했고, 대의나 정의, 휴머니즘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과 가족만을 챙기는 사람을 속물이라고 단정했다. 그런데 제가 나이가 들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고, 다시 제 자식을 위해 일해야 했는데, 아이를 석 달째부터 어린이집에 맡겼다. 그때 우리 아이를 한 번만 더 봐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어린이집에 선물 공세를 했다. 2, 30대였다면 제도 시스템을 바꾸자고 했을 텐데, 막상 닥쳐보니 선물을 주는 사람이 돼 있더라. 정의롭지 않은 것이었다.”

 

삶의 경험을 통한 성찰과 이해를 말하는 대목에서, 그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깨달은 것도 많았다고 부연했다. “예전엔 글을 잘 쓰는 사람만 인정했고,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글을 잘 쓰고 싶지만 쓰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까지는 헤아려 보지 못했다. 그런 사람을 헤아리지 못한 문학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나중에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

 

한 번은, 글을 잘 쓰지 못한다고 생각한 한 학생이 그에게 글쓰기를 가르쳐 달라고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그는 황석영의 단편 「삼포가는 길」을 백 번 필사하라고 말했다, 큰 기대를 하지 않은 채. 학생이 소설을 한 번 필사하는 데 하루 세 시간씩 사흘 정도가 소요됐다. 그럼에도 학생은 무려 60여회를 필사했고, 놀랍게도 그 사이 문장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그는 이때 크게 깨달았다. 노력이야말로 중요한 재능이고, 지금 좋지 않다고 해서 함부로 너는 안돼, 라고 말해선 안된다는 걸. 마침 그 즈음 한 텔레비전에서 우연히 본, 한국예술종합학교를 창립한 이강숙 선생의 대담까지 더해진다. 좋은 선생과 나쁜 선생에 대해 묻자 이강숙은 “좋은 선생은 잘 모르겠지만, 나쁜 선생은 학생에게 안된다고 말하는 선생”이라고 했다. 이때부터 학생을 대하는 태도, 문학을 대하는 그의 태도가 바뀌었다.

 

“언제가 한 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선생님, 상처가 없으면 글을 못써요, 라고 묻더라. 이혼한 엄마가 자신을 닮은 언니만 예뻐하면서 자기를 보면, 쟤는 (이혼한) 애비를 닮아가지고, 하는 말을 평생 듣고 컸다고 한다. 이런 게 상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느냐. 이거야말로 자신에게는 절대적인 상처다. 우리는 상처라고 하면, 흔히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상처만 생각했는데, 어디 상처 없는 사람이 있겠느냐. 이런 질문도 깨달음을 줬다. 그 친구의 질문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상처에도 무게를 두고 살았구나, 하고 생각되더라. 우리는 보통 상처에 지는 사람이 있으면 왜 저러니, 하고 이야기하지만, 그 상황에 처해보지 않으면 쉽게 단정할 수 없다. 이를 테면, 아버지에게 맨날 맞고 자라던 아이가 커서 폭력을 휘두르는 사람이 됐다면, 이 친구를 나쁜 사람이라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자기가 감당할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사람이 세상에는 많다. 사회의 책임도 일부 있는 것이다. 이런 정도의 마음이 드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려, 마흔이 돼서야 깨달았다. 미운 사람도 있지만, 왜 저렇게 됐을까, 하고 보려 노력한다.”

 

요컨대, 정지아 소설들이 보여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세상에 대한 깊은 이해는 질척거리는 삶의 경험과 예상치 못한 좌절, 실패들이 시간의 강을 따라 흐르고 쌓이면서 사유를 확장시키고 이해를 심화시켜온 결과라 하겠다.

 

1965년 구례에서 태어난 그의 삶을 돌아보면, 시대와 삶은 이미 오래 전부터 희망과 좌절의 씨를 버무리고 성공과 실패의 물을 주면서 문학의 숲을 잉태하고 있었다. 공부도 잘했고 백일장과 학술제 등에서 각종 상을 휩쓸던 1974년 초등학교 4학년 시절,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같은 반 여자 친구가 내뱉은 말은. “빨갱이의 딸 주제에…” 2년 전 병보석으로 나왔던 아버지가 다시 감옥에 들어갔지만, 아버지의 죄를 무엇인지도 몰랐던 그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농협 창고에 쓰인 ‘멸공방첩’이라는 네 글자는 벗어날 수 없는 세계였고, 그를 문학의 숲으로 내몰았다.

 

“아무도 모르는 동네로 가고 싶어서, 엄마를 졸라 서울로 전학을 갔어요. 부모의 이데올로기 때문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자, 부모도 싫었고 세상도 싫었지요. 시골에선 모두 똑같아 빈부격차를 몰랐지만, 서울은 달라 빈부격차도 느껴졌어요. 세상이 저를 이해주지 않았고, 저를 이해해주는 건 문학밖에 없었죠.”

 

세상은 예상치 못한 마구를 던졌고, 삶은 소설처럼 꽂혀야 했다. 방황과 염세주의의 중고 시절과 순천 낙향, 재수 끝에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입학과 학생운동, 사노맹 외곽조직 연루와 3년의 수배, 자수와 집행유예….

 

그럼에도 문학만은 팽나무처럼 그를 지켜서 1990년 남로당 빨치산이던 부모의 삶을 담아낸 『빨치산의 딸』을 펴냈고,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고욤나무」가 당선되면서 등단할 수 있었다. 대학원에 들어가 석박사학위도 받았다.

 

―등단도 하기 전에 ‘이적 표현물’ 레테르가 붙은 『빨치산의 딸』을 펴냈는데.

 

“이태 선생이 1988년 『남부군』을 출간하면서 ‘빨치산 붐’이 일었다. 이 선생의 책은 사실은 틀리지 않았지만 바라보는 관점이 자유주의자의 시선이었다. 즉 그는 빨치산들을 안타깝게 바라봤지만, 많은 빨치산들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쳤기에 억울하지 않다는 시각이었다. 많은 이들이 빨치산 활동을 했던 부모를 찾아왔다. 소설가 송기원 선생도 찾아왔는데, 아버지가 딸에게 자신들의 이야기를 쓰도록 하겠다고 하니까, 『빨치산의 딸』로 하라고 제목을 정해줬다. 부모님의 말을 듣고 썼다. 문학적 묘사가 들어가 있지만, 내용은 거짓이 없는 실록이다. 예를 들면 달이 훤한 밤이었다고 부모가 말하면, 저는 그것을 묘사한 것이다.”

 

―왜 다시 등단 절차를 밟은 것인지.

 

“사실 등단을 안했어도 작가로 활동할 수 있었고, 몇 군데에 글도 싣는 등 이미 활동도 하고 있었다. 다만 『빨치산의 딸』로 갑자기 사회적으로 큰 인정을 받으면서 겁이 났다. 역사적 의미는 있지만, 결코 좋은 소설은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 나중에 대학원 들어가서 글을 썼는데, 선생이 보더니, 이거 신춘 내봐라, 해서 냈다. 『빨치산의 딸』은 송기원 선생이 쓰라고 해서 쓴 것으로, 제 실력이 객관적인 관문을 통과할 만한 것인가 아닌가를 시험해 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당시 신춘문예도 많지 않았고 주소를 아는 곳이 조선일보밖에 없어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응모했다.”

 

그는 등단 이후 소설집 『행복』(2004), 『봄빛』(2008), 『숲의 대화』(2013) 등을, 청소년소설로 『숙자 언니』, 『어둠의 숲에 떨어진 일곱 번째 눈물』, 『노구치 이야기』 등을 펴냈다. 이 사이 김유정문학상, 이효석문학상, 한무숙문학상, 오늘의 소설상, 노근리평화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작품 세계를 설명해 달라.

 

“늙은 혁명가 엄마 아빠를 모시고 통일 전망대를 여행가는 딸의 시선을 그린 작품 「행복」 등을 비롯해 소설집 『봄빛』까지는 대체로 역사적 상흔을 가지고 고달픈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그렸다. 역사적 상흔을 전면으로 내건 작품은 몇 개 없고, 대체로 사소하게만 등장한다. 『숲의 대화』부터 조금 유머러스해지고 넓어지기 시작했고, 이번 소설집에서 조금은 더 넓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의 삶은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모교 강의와 이어진 소설 창작, 결혼과 이른 이혼, 아버지의 작고, 어머니의 숙환과 투병 생활…. 그야말로 마구로 가득 찬 파란만장이었다.

 

―소설 속에서 어머니가 “아야, 야멸차게 글지 마라. 사는 거이 다 맘대로 된다디야? 니는 살아봉게 다 니 맘대로 되디야?”라고 말한 부문이 기억에 남는다.

 

“마흔까지 (마음대로) 되는 줄 알았고, 오만방자하게 살았다. 그런데 이혼도 했고…. 맘대로 되는 세상이 어디 있겠느냐. 이를테면 제가 삼십대까지만 해도 위를 보면서 더 나은 인생을, 더 많은 성취를, 더 좋은 글을 원했던 것 같다. 마흔쯤 지나고 지금쯤 되니까, 잘 산다는 게 그런 게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생각이 들면서 위를 보던 시각을 아래로, 다시 위아래가 어디 있는가, 하는 생각에까지 미치게 되더라.”

 

―2011년 아버지 기일에 맞춰 태어난 구례로 귀향했는데.

 

“구례는 제 삶과 문학의 원형 같은 곳이다. 부모는 백운산 자락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백운산, 엄마는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했고, 제가 태어난 공간 역시 백운산 자락이었다. 역사적 상흔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전근대적 공간이었다. 또 때 묻지 않는 자연이 영향을 미쳐 자연을 좋아하게 한 것 같다. 자연이 주는 상상력과 영감이 꽤 커서 구례가 저에겐 처음이자 마지막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하루 일과는 어떤지.

 

“아침 여섯시쯤 일어나 밭에 가서 김을 매고, 이어서 개를 산책시키고 밥을 주고, 고양이 똥을 치우고 밥을 준다. 오전 10시쯤 엄마랑 밥 먹은 뒤 저녁까지 자유시간이다. 장에 가거나 1주일에 한 번씩 광주로 가서 강의를 한다. 지난 학기에는 도서관 강연이 많았다. 오후 5시부터 식사를 준비해 저녁을 먹은 뒤 오후 7, 8시부터 다시 오후 12시까지 자유 시간이다. 잠이 많지 않다.”

 

2013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구례 생활을 강태공의 그것과 비유하기도 했다. “강태공은 물을 보면서 자신과 세계를 들여다본 사람이죠. 반면에 이태백은 물에 뜬 달을 보고 달로 떠나버린 사람이고요. 저는 강태공 쪽이라 생각합니다.”

 

인터뷰 끝자락에 앞으로 어떤 작가, 작품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묻자, 그는 ‘총체성’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개항에서 오늘날까지를 망라한, 한국 현대사를 다룬 대하 장편소설을 쓰고 싶어요. 한국의 근대가 어디에서 어떻게 열렸고 식민지 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쳐 어떻게 오늘에 이르렀는지를, 좌익의 관점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어쩌면 그건 마구처럼 시대에 내던져진 자신의 삶이 익고 익어서 던져준 숙제이거나 운명인지도. 그러니까, 염천의 백운산 자락 무수내에서 정지아의 삶과 문학은 그렇게 더 따뜻하고 더 깊어지고 있었다, “살아온 만큼,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 귀로의 에메랄드 하늘에서 솜사탕 같은 구름이 오래 부유하고 있었다.(2021.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