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막힐 듯한 연출과 디자인’, ‘형언하기 힘든 시각과 예술적 경험의 창조자’, ‘끝없는 노력으로 만들어진, 악보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는 조명·의상·안무’
쏟아지는 비평가 찬사 속에 세계 주요 오페라 극장에 작품을 올려온 오페라 무대 슈퍼스타 스테파노 포다가 4년 만에 다시 국내 무대에 선다. 국립오페라단을 통해 베르디의 ‘나부코’를 선보이기 위해서다. 2015년 ‘안드레아 셰니에’, 2017년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차원이 다른 영감으로 만들어진 마법 같은 무대를 선보인 지 4년 만이다.
자신의 독창적 세계를 연기는 물론 무대·조명·의상·안무 등 모든 요소를 동원해 홀로 무대에서 구현하겠다는 포다의 목표는 샘솟는 영감의 뒷받침이 있기에 가능하다. “제 작업은 리얼리즘이 아닙니다. 눈을 감고 ‘나부코’를 떠올리면 마치 카라바조의 그림처럼 어떤 공간을 상상할 수 있고, 어떤 우주를 상상하게 되고, 어떤 빛을 상상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연결되는 거죠. 저는 이 많은 일을 따로 나눌 수가 없어요. 말보다 그림을 먼저 그리기 시작한 어린아이 때부터 혼자 앉아서 머릿속에서 세상을 만들었고, 같은 작업을 지금도 조금 더 전문적 방식으로 하는 거죠.”
1인 5역을 불사하는 통합적 연출은 ‘스테파노 포다 오페라’의 특징인 ‘미장센(Mise-en-scene)’의 완성으로 이어진다. 관객이 볼 수 있는 모든 무대 위 요소를 총체적으로 설계해 하나의 미학으로 구현하는 미장센은 그에겐 완벽한 연기를 끌어내기 위한 기하학적 구조를 쌓는 필수 작업이다. “(미장센 구축은) 장인으로서 본능적인 작업이고 때로는 고통스러운 일이에요. 무대 위에서 나는 이성적인 생각을 따르지 않고 마치 ‘잃어버린 조국’처럼 꿈을 향한 본능에 따라 움직입니다. 무대 위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조각부터 그림, 의상부터 조명, 안무부터 명상까지 배우느라 일생이 걸렸습니다”
국립오페라단의 ‘나부코’공연은 16년 만이다. 기원전 6세기 이스라엘 유대인이 대제국 바빌론의 포로가 되어 낯선 땅으로 끌려가는 ‘바빌론 유수(幽囚)’가 배경이다. 유대인 노예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노래한다. 마침 일제강점기를 겪은 우리나라에서 8월 15일 광복절 즈음에 개막하는데, 정작 포다는 “예술은 정치가 아니다”며 영원불멸의 내적 가치를 보여주겠다는 뜻을 밝혔다. “예술을 어떤 특정한 역사, 사회, 정치 상황의 틀에 가둬버리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시공을 초월하는 영역에 제 작업의 뿌리를 둘 것입니다. 좋은 사람도 없고 나쁜 사람도 없고 선한 민족도 없고 악한 민족도 없습니다. 다만 그 속 개인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내면의 충돌에 주목할 겁니다. 제게 ‘나부코’는 인간 내면의 회심에 관해 이야기하는 영적 오페라입니다.”
이번 ‘나부코’가 특정한 시대적 언급 없이 군복도, 선과 악도, 무기도, 압제자도 등장하지 않는 무대가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포다가 주목한 것은 한민족 특유의 정서인 ‘한(恨)’. 억압에 시달리고 고통받으면서도 존엄성을 간직하는 사람들이 우애 속에서 결속하고 하나로 되게 해주는 감정이다. 포다는 “저의 95년 작 ‘나부코’와 이번 ‘나부코’ 사이에는 26년의 세월이 있고 그동안 굉장히 어려운 길을 걸어와야 했다”며 “훨씬 더 성숙한 인식을 갖고 일을 한다. 요즘에는 결국 뭔가 더 본질적이고 깊이 있는 새로운 것을 찾고자 하는 생각에 젖어서 일하게 된다”고 말했다.
“2020년 리허설 직전 중단된 콜론 ‘나부코’와도 다를 거예요. ‘팬데믹’이란 엄청난 사건이 있었고 그 후 1년 동안 20년쯤 되는 세월을 겪은 듯합니다. 이번 ‘나부코’는 그동안 제가 ‘나부코’에서 이야기해온 모든 과정의 끝에 있습니다. 한국인 예술가들을 통해 ‘한’을 알고나서 ‘많은 민족이 역사 속에선 동떨어져 있지만 유사한 감정을 경험했구나’라고 정말 강렬한 인상이 남았습니다. 역사 속 상처를 극복하려는 의지는 베르디가 전달하려 했던 정서를 즉각적으로 이해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억눌린 울음, 내면의 상처,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울음. 이것이 바로 ‘나부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뻔한 이야기보다 훨씬 더 깊은 감정이고 결국은 우리를 성장하게 한다고 생각해요. 이런 ‘한’을 아마 부에노스아이레스였다면 이야기할 수 없었겠죠.”
이탈리아 출신으로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팬데믹 기간 동안 큰 고통을 겪었다는 포다는 이런 경험이 불필요한 것들은 모두 덜어내고 예술의 본질에 보다 천착하게 하였다고 말한다. 이번 무대 역시 필요한 것만 남기고 싶은데, 그러한 시도가 성공적으로 평가받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끊김없이 샘솟는 영감의 원천에 대해 묻자, 포다는 “때로는 저주 같다”고 말했다. “영감은 공부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준비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신이 ‘번쩍’하고 내려주는 것도 아니죠. ‘한’을 처음 듣고 오륙년을 그것에 대해 땅속을 흐르는 샘물처럼 늘 생각했는데 한국에서 ‘나부코’ 연출 제안이 온 거예요. 영감을 얻고 싶다면 밖에 나가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그리고 어느 순간 음악을 다시 들어보고, 머릿속 지성이 일하지 않는 순간이 찾아오면 모든 것이 흘러나옵니다.”
국립오페라단 ‘나부코’,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8월 12일부터 15일까지. 14일 오후 3시 공연은 크노마이오페라LIVE에서 실시간 온라인 유료 생중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