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는 으레 귀한 손님이나 또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항상 닭 한 마리를 삶아 대접했다. 냉장, 유통이 어려운 시절 집집마다 키우던 토종닭들은 유통기한이 긴 양질의 단백질이자 재산이었을 것이다. 영화 ‘관상’에서 닭백숙을 먹는 세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
#영화 ‘관상’
“관상가 양반,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읽기만 해도 바로 음성 스트리밍이 되는 것 같은 이 대사는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은 이정재가 관상가 역을 맡은 송강호에게 던지는 명대사다.
#관상의 닭백숙
내경과 연홍의 첫 만남 장면은 정말 국가대표 배우들의 연기의 향연이다. 표정 하나하나 좁은 공간에서 오가는 말 한마디가 앞으로 볼 스토리에 기대감을 잔뜩 가지게 해준다. 연홍과의 잠깐의 담소로 받은 돈으로 내경과 팽헌은 닭백숙을 준비하며 진형을 기다린다. 팔팔 끓고 있는 무쇠솥에 닭을 휘저으면서도 조정석이 연기한 팽헌의 푼수 같은 행동들은 영화 내내 즐길 수 있는 중요한 오락거리이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잘 익은 토종닭의 다리 하나를 쭉 찢어 아들에게 주는 내경, 그리고 나머지 다리 하나를 바라보던 팽헌의 기대감을 무시하듯 자연스럽게 다리를 뜯어 먹는 내경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송강호만이 할 수 있는 유니크한 연기 아니었을까 싶다. 허름한 복장이지만 남자 셋이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닭백숙을 먹는 모습은 마치 김홍도의 풍속화 속 백성들처럼 꽤 정감 있게 느껴진다. 그들은 앞으로 지금보다 멋진 옷을 입고,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만 영화가 끝나는 부분까지 셋의 이런 정감 가는 모습은 다시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닭백숙과 토종닭
닭백숙의 역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부터 닭을 사육했다고 하니 문헌에 기록되진 않았을지라도 아마 삼국 시대 이전부터 닭을 삶아 먹는 방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백숙은 양념하지 않고 익힌다는 뜻으로 굳이 닭이 아니라 생선이나 다른 고기를 익힌 것도 백숙이라고 칭할 수 있다. 흔히 닭을 많이 먹기 때문에 닭백숙이라는 말이 입에 잘 달라붙는다. 토종닭은 단순히 삶기만 하면 안 되고 영화처럼 무쇠솥으로 뚜껑을 닫아 마치 압력솥에 조리하는 것처럼 해야 단단하고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먹을 수 있다. 토종닭은 뼈가 굵고 육질이 단단한 만큼 국물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뽀얀 국물에 소금 조금만 쳐도 다른 재료가 필요 없는 보양식이 된다.
비슷한 요리로는 삼계탕이 있다. 백숙과 삼계탕은 조리하는 방식이 같은 요리이나 결이 다르다. 백숙은 토종닭이나 큰 닭을 있는 그대로 삶는 반면 삼계탕은 어린 영계에 ‘삼’을 넣어 조리한다. 또 백숙은 역사가 깊지만 삼계탕은 그리 길지가 않다. 일제강점기 요리책인 ‘조선요리제법’에 삼계탕이 처음 명시된다. 1950년 이후에는 토종 닭백숙보다 삼을 넣은 영계백숙인 삼계탕이 더 유행한다. 일제강점기 때 양계업이 크게 성장하고 그때 들여온 개량종이 성장이 느리고 번식이 더딘 토종닭들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로는 미국에서 들여온 육계들로 인해 한동안 토종닭들은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식재료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토종닭의 개체수 확보와 토종닭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많이 생겨나 조금씩 그 영광의 자리를 되찾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닭백숙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풀레로티’(로스트 치킨)가 있다. 즐거운 파티 자리에 노릇하게 구운 통닭 한 마리를 큰 접시에 담아 들고 나오는데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먹는다는 점에서는 우리랑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