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폭염이 잦아들면서 새벽에는 완연히 선선하다. 매미 울음은 약해지고 풀벌레 소리가 올라서는 중이다. 또한 권력의 가을이기도 하다. 대선이 6개월 정도 남으면서, 시민들 눈길이 ‘다음’의 말과 행동으로 모이고 있다.
J G 프레이저의 ‘황금가지’는 권력의 죽음과 공동체의 부활을 다룬다. 두 권 합쳐서 1556쪽에 달하는 이 대작은 이탈리아 중부의 호숫가 마을 네미에 전해오는 기이한 전설에서 시작된다. 마을에는 디아나 여신의 사제이자 ‘숲의 왕’이라는 이름의 마을지도자가 있다.
경쟁자를 무찌르고 숲의 왕이 되려면 두 과정을 거쳐야 한다. 먼저, 신전 숲에 있는 성스러운 나무를 찾아 황금가지를 꺾는 모험을 치르고, 이어서 전임자와 겨루어 이긴 후 그 가지로 그를 찔러서 죽여야 한다. 저자에 따르면, 권력의 교체와 관련한 이 잔혹한 의례는 다양한 관습과 축제를 통해 전 세계에서 비슷하게 반복된다.
가령, 탈라베티파로티암(참수제)이라는 남인도 지방의 한 제도도 숲의 왕과 비슷하다. 이곳에선 한 사람에게 5년 동안 사법과 행정의 절대권력을 부여한다. 그러고 나서 임기 후엔 마을 사람이 모두 모인 가운데 그 목을 쳐서 허공에 던져올린다. 사람들은 잘린 목을 주우려고 앞다투어 달려드는데, 그것을 얻는 사람이 다음 5년 동안 왕으로 영예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디아나는 풍요의 여신이고, 황금가지는 넘치는 생명력을 상징한다. 이는 지도자 역할이 공동체의 풍요를 가져오고 활력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것임을 암시한다. 재난이 생기거나 통치를 잘못해서 공동체에 위기에 찾아올 때, 또는 왕의 육체가 늙거나 병들어 더는 풍요를 상징하지 못할 때, 사람들은 권력의 목을 쳐서 숲의 왕을 ‘더 강하고 더 교활한’ 왕으로 교체한다. 신성한 왕의 죽음을 통해 세계의 멸망을 피하고 공동체를 되살리려는 것이다. 어쩌면 선거란 이 주술적 의례의 현대적 제도화일지도 모른다.
더없는 영예를 누릴 기간은 고작 5년뿐이고, 다음엔 무조건 죽음이 찾아온다. 그러나 사람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숲의 왕이 되려고 한다. 권력 욕망 때문이다. 나쁘게 볼 일만은 아니다. 이 욕망 안에는 공동체의 닥쳐온 위기를 해결함으로써 신적인 진리를 자기 이름 아래 구현하려는 영웅적 소명이 들어 있다. 저자는 말한다. “타인을 위해서, 자유와 진리의 축복을 위해서 생명까지 버리는 것이 영웅이다.” 권력은 죽음을 동반하기에 생명을 던지면서까지 실현하고 싶은 소명이 없는 사람은 지도자가 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일시적 향락이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쉽게 비겁해지거나 타락하기 때문이다.
‘황금가지’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사례를 통해 ‘숲의 왕’ 이야기가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보여준다. 이로써 프레이저는 세계 각지의 서로 다른 제의나 신화 속에는 인류 전체를 관통하는 ‘닮은꼴 사고’가 존재한다는 점을 증명했다. 인류 공통의 사고 패턴을 찾으려는 이러한 시도는 후대의 인류학, 종교학, 정신분석학, 문학 등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현대인의 온갖 행위 속엔 여전히 석기시대 조상에게 물려받은 원형적 사고가 담겨 있다. 엘리엇이 이 책에 영감을 받아 ‘황무지’를 썼듯, 낡은 권력의 목을 베고 몰락하는 공동체에 생기를 불어넣으려 할 때마다 사람들은 신화와 종교의 영원한 지혜에 귀를 기울인다. ‘숲의 왕’ 이야기가 오늘의 우리에게도 울림을 주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