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아프가니스탄 철군 발표 4개월 만에 말 그대로 ‘빛의 속도’로 아프간이 무너지면서 불과 2개월 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의 정상회담이 새삼 미국인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있다. 당시만 해도 더 없이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하며 아프간이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확고한 파트너가 될 것처럼 얘기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전부 다 ‘쇼’ 아니었느냐는 지적이다.
여기에 아프간 수도 카불에 탈레반이 진입하자마자 가니 대통령이 돈다발을 들고 도망쳤다는 외신 보도까지 전해지면서 상당수 미국인은 ‘바이든이 사기꾼 가니한테 속았다’는 격한 반응을 내보이고 있다.
17일 외신에 따르면 가니 대통령은 지난 6월 25일 미국을 방문해 백악관에서 바이든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올해 1월 바이든 정부 출범 후 백악관을 찾은 외국 정상들 가운데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에 이어 3번째에 해당했다. 아프간 국내는 물론이고 국제사회도 미국이 아프간을 그만큼 중시한다는 증거로 받아들였다.
아프간 입장에선 많은 성과가 있었다. 회담 직후 내놓은 공식 발표문에서 두 정상은 아프간에 대한 미국 정부의 확고한 지원 의사를 밝혔다. 구체적으로 바이든 대통령은 가니 대통령한테 아프간의 심각한 코로나19 상황 타개를 위한 백신 300만회 접종분 제공, 아프간 정부와 탈레반 반군(反軍) 간 내전 종식 협상에의 지속적 참여, 미군 철수 이후에도 미·아프간 양자관계의 굳건한 유지 등을 약속했다.
특히 바이든 대통령은 “철군 후에도 아프간 국민들의 안전을 지키는 건 여전히 미국의 최대 관심사”라면서 아프간 ‘여성’과 ‘소녀’를 콕 집어 지원 대상으로 명시했다. 남녀차별이 극심하고 무엇보다 소녀들의 학교 교육과 여성들의 사회활동에 반대하는 입장이 확고한 탈레반을 의식한 조치였다.
하지만 아프간 내전이 정부군의 완패, 그리고 탈레반의 압승으로 귀결되면서 ‘두 정상이 만나고 채 2개월도 안 되는 그 짧은 기간 동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는 의문이 커지는 분위기다. 일단 바이든 대통령은 아프간 정부, 그리고 가니 대통령을 탓하기에 바쁘다. 16일(현지시간) 대국민 연설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6월 가니 대통령을 백악관으로 초청했을 때, 7월 가니 대통령과 전화통화를 했을 때 우리는 매우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며 “부패를 청산하고 지도자들이 정치적으로 단결해야 한다고 충고했으나, 아프간 정부는 그 어느 것도 하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이어 “가니 대통령은 아프간 군대가 탈레반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분명히 그가 틀렸다”고도 했다.
좋게 말하면 가니 대통령이 바이든 대통령 면전에서 한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것이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바이든 대통령이 가니 대통령의 거짓말에 속았음을 보여주는 정황이기도 하다. 마침 러시아 스푸트니크 통신은 “아프간 정부가 붕괴할 때 가니 대통령은 돈으로 가득한 차 4대와 함께 탈출했다”고 보도했다. 이어 “돈을 (탈출용) 헬기에 실으려 했는데 모두 들어가지 못해 일부는 활주로에 남겨둬야 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아프간 국내에선 가니 대통령을 ‘사기꾼’ 등 표현을 써가며 맹렬히 비난하는 모습이다. 미국 조야에선 바이든 대통령이 가니 대통령의 정체를 좀 더 일찍 파악하고 가니 정권이 아닌 아프간 국민 편에 섰다면 이렇게 허무하게 탈레반한테 정권을 빼앗기는 일은 없었을 것이란 아쉬움의 목소리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