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군을 철수시킨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1960년대 베트남전쟁 개입 확대를 지지했던 전임 대통령들을 비판하며 ‘미국의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분쟁 속에 무기한 머물면서 싸우는 실수를 범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이는 ‘동맹’보다는 미국의 ‘국익’에 방점을 찍은 발언으로, 한국 등 다른 동맹국을 향해서도 ‘영원한 동맹은 없다’는 경고를 던진 것으로 풀이된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간 수도 카불을 장악한 직후인 16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아프간 사태를 주제로 대국민 연설을 했다. “미군의 성급한 철수가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을 초래했다”는 비난 여론이 거세지자 여름 휴가 도중 다급히 백악관에 복귀한 것이다.
이를 두고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북한학)는 “미국이 세계 경찰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이미 오바마 행정부 때 시작됐고 계속 그런 방향으로 갈 것”이라며 “셰일가스 혁명 이후 아프간이 더 이상 미국의 핵심 이익이 아니게 된 순간부터 예고된 사태”라고 짚었다. 박 교수는 “미국이 예전처럼 동맹국에 대해 무조건적 안보 제공을 하지 않는다는 점은 한국에도 시사점이 크다”며 “미국의 새로운 핵심 이익이 된 중국과 인도·태평양 전략에 대해 한국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도 눈여겨볼 것”이라고 관측했다.
◆‘국익 우선’ 못 박은 바이든… 무상 안보 제공 불가 의지 표출
“대통령선거 출마 때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군사 개입을 종식시키겠다고 미국 국민들에게 다짐했다. 힘들고 지저분하고(hard and messy), 완벽과는 거리가 멀지만(far from perfect) 나는 약속을 지켰다.”
아프간 전쟁 종료와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아프간 점령에 대한 16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대국민 연설은 ‘정면돌파’와 ‘책임 떠넘기기’가 뒤섞이며 사태의 혼란상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외신들이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타격이 불가피할 것’이란 분석을 내놓는 가운데 국내 전문가들은 한·미동맹에 미칠 영향에 주목하는 모습이다.
◆미 정가, 여야 막론하고 바이든 비판
바이든 대통령은 연설 내내 철군의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는 “아프간 정치 지도자들이 포기하고 국외로 도망쳤다. 아프간 군대는 싸우려 하지도 않고 무너졌다”고 말했다. 이어 “미군은 아프간군이 자신들을 위해 싸우려 하지 않는 전쟁에서 싸워서도 안 되고 죽어서도 안 된다”고 강조했다.
미 조야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듯 바이든 대통령은 대국민 연설을 마친 뒤 기자들의 질문을 받지 않고 회견장을 떠났다. 그는 곧장 메릴랜드주의 대통령 전용 별장 캠프 데이비드로 향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정치전문매체 ‘더힐’은 “바이든은 자신의 결정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았고, 카불의 혼란에 대한 책임을 아프간 정부에 되풀이했다”고 꼬집었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 행정부가 전쟁을 끝내기로 한 것은 옳았다”면서도 “하지만 더 나은 아프간을 위해 희생한 모든 사람들에게 사전 준비 없는 그와 같은 혼란으로 끝낼 필요는 없었다”고 비판했다.
여야를 막론하고 바이든 대통령을 향해 쓴소리가 쏟아졌다. 세스 물튼 민주당 하원의원은 “국가안보 실수일 뿐 아니라 정치적 실수”라고,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미국의 명성에 오점을 남길 것”이라고 각각 날을 세웠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도 바이든 대통령을 겨냥해 “어떻게 일 처리를 이렇게 하느냐”고 조롱했다.
◆한·미동맹에 미칠 영향에도 ‘관심’
국내 전문가들은 ‘미국이 예전 같지 않다’는 점에 더 주목하는 분위기다. 박원곤 이화여대 교수(북한학)는 17일 “이전처럼 미국이 동맹이면 무상으로 안보 및 공공재를 제공할 능력이 안 되고 의지도 없다”고 했다. 박 교수는 “그렇다고 미국이 세계 최대강국의 지위에서 내려올 생각은 없다”며 “자신들이 가진 자원과 능력을 자신들의 이해에 초점을 맞춰 움직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마침 바이든 대통령은 연설에서 아프간에 대한 미련은 그만 접고 중국·러시아와의 경쟁에 ‘올인’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문성묵 한국국가전략연구원 통일전략센터장은 “미국은 아무리 동맹이라고 해도 국익과 맞지 않으면 얼마든지 입장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며 “지금은 중국과 전략적 경쟁 등으로 한국을 활용하는 측면이 있지만, 만약 한국이 주한미군을 원치 않고 미군에 대한 반감을 가지면 미국 내 여론이 돌아설 수 있다. 그러면 미 의회와 대통령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라고 지적했다.
탈레반이 장악한 아프간과 한국의 관계 설정도 관심사다. 장지향 아산정책연구원 중동센터장은 “탈레반 정권이 복귀하는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관계 재설정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을 것이고, 미국의 움직임을 보고 함께 움직이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최영삼 외교부 대변인은 “여러 상황을 종합적으로 지켜보면서 검토하겠다”고 밝혔다.
◆두려움에 텅 빈 거리… 온몸 감싸는 부르카 품귀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은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20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 지난 15일(현지시간) 이후 공포와 불안, 혼돈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16일 하미드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일어난 아비규환이었다. 카불 탈출을 위해 몰려든 수천명이 활주로까지 침범하며 공항 운영이 마비됐다. 심지어 이륙하는 비행기에 매달렸다가 추락해 사망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공항은 오후 늦게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아 11시부터 운영이 재개됐다. 케네스 매킨지 미 중부사령관은 전날 카타르 도하에서 45분간 탈레반 고위 대표단과 회동하면서 “미국 측 인원과 아프간 시민의 대피를 방해하지 말라”고 엄포를 놓았다.
아수라장이었던 공항과 달리 카불 시내는 한산한 모습이다. 소수 식료품점과 빵집, 식당을 제외한 대부분의 상점은 문을 닫았다. 국외로 탈출할 희망이 없는 이들은 은신해야 할지 아니면 탈레반 치하의 삶을 새로 꾸려나가야 할지 저울질 중이라고 영국 일간 가디언이 전했다.
수하일 샤힌 탈레반 대변인은 “민간인의 생명과 재산, 명예에 어떠한 위협도 가하지 않겠다”며 아프간에 남아 재건에 동참할 것을 독려했다. 이들은 외국 군대를 도운 전력이 있어도 특별사면한다고 발표한 뒤 “모든 공무원은 업무에 복귀하고, 여성도 참여하라”고 했다. AFP통신은 “탈레반이 아프간 뉴스 채널에서 여성 기자와 인터뷰하고, 헤라트 여학교의 문을 다시 여는 등 여성 인권과 관련해 연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5년간 극단적인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적용했던 탈레반의 강압 통치를 기억하는 시민들은 공포에 떨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탈레반 조직원들이 카불 거리를 장악하고 정부 관리 집과 사무실, 언론사 수색에 나섰다”고 전했다. 정부에 협력한 사실이 있는지, 반이슬람적 자료가 있지는 않은지 등을 뒤지고 있다는 설명이다.
여성들, 특히 직업을 가진 여성은 더욱 겁에 질린 모습이다. 남성을 동반하지 않은 단독 외출조차 불허됐던 20여년 전 기억이 생생해서다. 탈레반은 재집권하자마자 “히잡을 쓴다면 여성도 학업과 일자리에 접근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를 불신하는 여성들이 집에 머물면서 “거리에 여성이 거의 보이지 않고, 외출한 여성들도 예전보다 훨씬 보수적으로 옷을 입었다”고 CNN방송이 전했다. 머리부터 발목까지 모두 가리는 이슬람 복장 부르카는 품귀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탈레반이 최근 점령한 곳에서 여성을 조직원과 강제로 결혼시켰다는 소식도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