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대전 이후, 이만큼 인간이 철학적 성찰을 해야 하는 시대가 또 있었을까. 세계는 전염병이 돌출하면서 공통의 문제를 맞닥뜨렸다. 모두가 전염병 공포 속에 살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생활했다. 동시에 넘쳐나는 유동성 탓에 근래 유례가 없는 풍요로움이 신기루처럼 목격된다. 죽음이라는 인간의 유한함, 무한해 보이는 자본주의적 팽창이 동시에 펼쳐지는 이 시대는 실존주의 철학이 탄생했던 시대의 데자뷔처럼 다가온다. 미디어아티스트 강이연 작가 신작은 이 같은 동시대 특징을 꿰뚫은 성찰이 담겨 있다.
서울 종로구 삼청로에 위치한 PKM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강이연:앤트로포즈(Anthropause)’에서 강 작가 신작 ‘무한(Infinite)’과 ‘유한(Finite)’이 전시되고 있다.
이어 다음 공간에서 만나게 되는 ‘유한’은 더 직접적으로 불편한 진실을 직시한다. 더없이 쾌청해 보이는 푸른 숲으로 바닥부터 벽면까지 공간 전체를 매핑했다가 이내 고층빌딩 숲과 전쟁음향으로 치닫는 속도감 있는 영상작품이다. 두 작품은 정반대 의미의 제목이 붙어 있고, 풀이방식도 대조적이지만 같은 메시지로 귀결되며 강한 인상을 준다.
전시 제목 ‘앤트로포즈’는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발생 이후 만들어진 신조어로, 인류의 정지상태를 뜻한다. 한국보다는 영국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해온 강 작가는 런던에서 팬데믹 시절을 겪으며 이번 작품을 구상했다. 코로나19로 일상이 정지된 도시에서 그는 이번 세계적 멈춤의 시간이야말로 무의미하게 흘려보낼 시간이 아니라 성찰의 시간, 사유의 시간이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번 작업을 진행했다고 한다.
마침 전염병 바이러스는 변이를 통해 다시 한 번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끝이 보이는 듯했던 바이러스와의 싸움도 다시 현재진행형이다. 변이는 바이러스를 이긴 인간 승리 신화를 무너뜨리고 있다. 코로나19 발생과 인류의 정지상태도 한해를 넘겼지만 작가의 메시지는 더욱 시의적절해졌다.
이미 입소문을 타고 관람객들이 꾸준히 걸음 했다. 평일에도 갤러리 앞에는 예약된 시간에 맞춰 입장하기 위해 거리두기를 하며 대기하고 있는 방문자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컴퓨터 기술의 기교로 비주얼은 화려하나 개념은 빈곤한 미디어아트 작품들 사이에서 갈증이 깊어지고 있던 미술계에서는 ‘특히 반가운 작품’이라는 호평이 나오고 있다. 전시장 2층 별도 공간에서는 작가의 두 작품의 설계도 격인 연필 드로잉 작품들도 선보인다. 작가가 작품을 어떻게 구상하고 준비했을지 호기심이 생긴 관람객들에게는 궁금증을 해소할 기회다.
갤러리 관계자는 “강 작가는 환경문제에도 천착해온 작가”라며 “작품이 가진 시각적 매력과 작품에 담겨 있는 개념과 의미가 잘 균형을 이루는 작품이 모처럼 나온 것이어서 특히 호응을 얻고 있다”고 전했다. 2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