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015년의 실수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의 뒤를 이을 가능성이 큰 아르민 라셰트 독일 기독민주당(CDU)·기독사회당(CSU) 연합 총리 후보는 16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이렇게 말했다. 2015년 시리아 내전 이후 몰려든 난민을 대거 받아들이면서 내홍을 겪은 독일은 아프가니스탄 난민 수용에 대한 국제적인 여론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과거 반복 안 돼...빗장 잠그는 유럽
이슬람 무장조직 탈레반이 아프간을 점령한 이후 이어지는 난민 행렬에 국제사회에서 선뜻 수용의사를 받아들이는 국가가 별로 없다. 인권을 중시하는 유럽국가들도 아프간 난민들이 자국으로 오는 걸 꺼리고 있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난민들이 파키스탄 등 아프간 인근 국가에 안전하게 머물도록 지원할 계획”이라며 자국 난민수용이 아닌 ‘인접국 지원’에 무게를 뒀다. 중동 지역 난민이 유럽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인 오스트리아는 난민수용 불가 방침을 밝혔다. 프랑스도 아프간 붕괴 영향을 유럽이 모두 감당할 수 없다면서 유럽연합(EU) 차원에서 강경 대응할 것을 주문했다.
유럽국가들의 반응은 과거 시리아 사태 때와 180도 다른 것이다. 이 국가들이 일찍부터 난민 수용에 ‘벽’을 치는건 시리아 난민을 수용하면서 큰 사회적 갈등을 겪은 과거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아프간 난민 수용에 미온적인 메르켈 정부는 시리아 사태 당시 과거 역사에 대한 반성과 인도주의를 언급하면서 적극적으로 난민을 받아들였다. 2015년 한 해 독일로 들어간 난민만 89만명에 이른다.
시리아 난민들은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구 감소를 겪던 독일에 크게 도움이 됐다. 하지만 그늘도 짙다. 엄청난 사회적 갈등으로 후유증이 컸다. 반 난민을 기치로 내건 극우세력이 득세하는 토양이 됐다.
개방적인 난민 정책을 폈던 독일 정부도 결국 정책 방향을 틀었다. 경찰의 난민 통제 기능을 강화하고 추방 절차를 간소화하는 등 난민 제한 정책에 힘을 줬다.
그 결과 2016년 독일로 유입된 난민 숫자는 28만명으로 전년 대비 68% 줄었다.
난민의 주요 육상 경로인 발칸반도 폐쇄와 터키·EU의 난민 송환 협상 타결도 난민 유입 감소에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뉴욕타임스(NYT)는 당시 난민 개방 정책으로 지방선거에서 패한 기민당 당수 메르켈 총리가 난민 정책을 바꾼 게 주요 원인이었다고 분석했다.
◆자국 수용불가 vs 인도적 책임
많은 난민을 받아들이면서 사회적 혼란을 겪은 독일 내에서 아프간 난민수용에 대한 여론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독일의 책임을 말하며 인도주의적 지원을 위해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독일 공영방송 ARD의 ‘타게스샤우’에 따르면 ‘난민 갈등’을 경험한 독일 정부는 아프간 난민 문제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라셰트 총리 후보뿐만 아니라 율리아 클뢰크너 농림부 장관과 토마스 스트로블 기민당 대변인은 2015년 상황을 반복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알렉산더 도브린트 기사당 원내대표는 “2015년의 잘못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독일이 유엔난민기구(UNHCR)에 많은 지원을 해서 현지에서 난민 문제에 대응하게 하는 것”이면서 “독일은 난민 분담 수용을 수락할 수 없다”고 밝혔다.
극우 성향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알리체 바이델 공동원내대표는 “독일 시민의 안전을 우선 생각해야 한다”며 망명 모라토리엄(유예)을 요구했다. 같은 당 티노 크루팔라 공동대표도 “2015년처럼 독일이 더는 통제력을 잃을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반면 니더작센주 정부의 사회민주당(SPD) 소속 보리스 피스토리우스 내무장관은 “연방 내무장관과 상원의원들은 위협받고 박해받는 아프간 사람들을 위한 연방정부 입국 프로그램에 찬성한다”고 밝혔다. 링케(좌파정당) 야니네 비슬러 공동대표는 독일이 특별한 책임이 있다고도 했다. 그는 “유럽연합에서 가장 부유한 국가로서 독일이 아프간 출신 난민 중 상당수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5년 시리아 상황과는 다르다
2015년과 지금의 상황을 단순 비교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국경이 엄격하게 통제되는 데다가 아프간에서 유럽까지 난민 이동 경로가 마땅치 않다. 과거처럼 수십만명의 난민이 유럽으로 단기간에 가기 어렵다는 얘기다.
아프간에서 유럽으로 가는 길목에는 이란과 터키, 그리스가 있다.
이란은 아프가니스탄 인접 지역에 텐트를 마련해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 다만 이란은 아프간 상황이 호전되면 난민을 송환한다는 방침이다.
터키는 이란을 거쳐 아프간 난민이 들어오는 걸 우려해 이란과 국경지대에 군병력을 늘렸다. 레제프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은 “이미 많은 난민을 수용하고 있다”며 “더는 난민을 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리스도 난민 유입을 막기 위해 터키와의 국경지대에 장벽을 세우고 경비를 강화했다.
피란민들이 아프간을 탈출할 방법도 여의치 않다. 독일에 거주하는 한 아프간인은 ARD의 팩트체크 코너 ‘ARD-faktenfinder’와의 인터뷰에서 “출구가 없다”고 말했다. 국경이 폐쇄됐고, 비자를 위해 수천 유로를 지불해야 하는데 은행들은 문을 닫았다. 많은 사람이 탈출을 원하지만 하늘길도 막혀 아프간을 떠날 방법이 없다. 미국과 동맹국들이 아프간 내 자국민과 현지 활동을 지원한 현지인들을 대피시키는 카불 공항에 수많은 아프간 피란민이 모인 이유다.
ARD는 “중기적으로는 새로운 탈출 경로가 나올 수도 있다”면서도 “아프간에서 유럽까지의 먼 거리, 폐쇄된 국경, 아프간의 상황을 고려하면 단기간에 수십만명의 사람들이 유럽으로 올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고 내다봤다.
독일 최대의 난민구호단체 ‘프로아질’(Pro Asyl)은 “독일 기관과 부처에서 일했거나 여성권과 인권을 위해 일했던 사람들이 탈레반의 지배 아래 아프간에 갇혀 있다”며 “모든 곳에서 장벽이 높아지는데 지금을 2015년과 비교하는 것은 왜곡하는 것이고 취약계층을 빠르게 챙겨야 하는 도의적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