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Reach)라는 이름의 소녀가 미국 시민이 되고, 나중에 미군 전투기를 조종하는 모습을 보는 게 저의 꿈입니다.”
탈레반을 피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탈출한 민간인들을 유럽 내 미군기지로 공수하는 작전의 책임자인 토드 월터스 미국 유럽사령부 사령관(공군 대장)의 말이다. 미 수송기를 타고 카불을 빠져나온 아프간 임신부가 독일 람슈타인 미 공군기지에 착륙한 직후 비행기 화물칸에서 출산한 여아의 이름을 ‘리치’라고 지었다는 소식에 대한 반응이다.
한국도 6·25전쟁 기간 흥남철수 때 북한에서 한국으로 향하는 피난민들이 탄 배 안에서 신생아들이 무사히 태어나 ‘크리스마스의 기적’으로 불렸는데, 리치의 사연은 바로 이 실화를 떠오르게 한다.
◆수송기에서 태어난 아프간 아기, 수송기 이름 딴 ‘리치’
26일 외신에 따르면 리치의 탄생은 참으로 힘든 조건 하에서 이뤄졌다. 리치의 엄마는 비행 도중 진통을 시작했으며, 람슈타인 기지에 착륙하자마자 미군 의료진이 투입된 가운데 수송기 화물칸에서 리치를 출산했다. 당시 미군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출산 소식을 전하며 “비행 고도가 8534m에 이르러 기내 기압이 떨어지자 응급상황이 벌어졌다”며 “긴급히 비행 고도를 낮췄고, 그 덕분에 임신부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고 소개했다.
영어로 ‘도달하다’라는 뜻의 리치라는 이름은 아기가 태어난 그 비행기에서 비롯했다. 리치의 엄마를 비롯한 아프간 피난민들을 태우고 독일에 도착한 미군 C-17 수송기의 코드명이 바로 ‘리치 828’이었다고 한다.
월터스 사령관은 “아기의 이름이 리치로 붙여졌다”며 “아프간 가족을 안전하게 데려온 수송기의 코드명이 리치 828이다. 아기 부모님이 코드명을 본떠 이름을 짓기로 했다”고 언론에 설명했다. 그러면서 “람슈타인 기지에 (아프간) 임신부들이 도착한 뒤 지역 의료센터에서 두 명의 아기가 더 태어났다”고 덧붙였다. 신생아가 현재까지 3명이란 얘기다.
◆흥남철수 배에서 태어난 한국 아기 5명, ‘김치1∼5’ 불려
6·25전쟁 도중인 1950년 12월 북진하던 한국군과 미군 등 유엔군은 갑자기 개입한 중공군에 가로막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결국 바다를 통한 후퇴를 결정한다. 유명한 흥남철수작전이다. 약 열흘 동안 흥남 부두를 통해 10만명 넘는 군 장병과 1만7500대의 각종 차량, 35만톤의 물자를 여러 대의 함정으로 철수시켰다. 이 과정에서 미군은 남한으로 가기로 결심한 북한 피난민 9만여명도 선박에 태워 데려갔다.
특히 7600톤급 화물선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1만4000명이 훨씬 넘는 북한 피난민을 싣고 항해한 끝에 경남 거제도 장승포에 닻을 내렸다. 배가 동해에 떠 있던 3일간 선내에선 임신 중인 여성 5명이 아기를 출산했다. 미군은 한국의 상징이 ‘김치’라는 점에 감안해 이 신생아들한테 ‘김치1’부터 ‘김치5’까지 이름을 붙여줬다. 비좁은 공간 등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다섯 아이는 무사히 살아남았다.
배가 거제도에 도착한 날은 마침 1950년 12월24일,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이를 두고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라고 했다. 2019년 영국 BBC 방송은 이 사연을 전하며 “당시 메러디스 빅토리아호에는 한국 문재인 대통령 부모도 타고 있었다”고 소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