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물관을 나온 국보급 문화재, 근현대 미술 걸작들을 만나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DNA: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

고구려 벽화부터 고려청자·이중섭
진경산수화·문인화·달항아리까지
국보·보물 35점, 근현대 작품 130점
聖·雅·俗·和 4개 키워드로 기획전시
시공 초월한 한국의 美 DNA 조명
작품 전시방식도 파격적이고 대담
전시전경.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은 어쩌면 같다. 박물관으로 간 고미술품과 문화재도 옛집은 화랑과 미술관이었으며, 미술관에 걸렸던 현대미술품도 결국 먼 미래엔 박물관으로 간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놓인 것들은 같은 운명이다.

하지만 박물관과 미술관은 다르다. 박물관은 문화재를 가장 정확한 자리에 보존하는 것이 최우선이나 미술관은 작품을 끊임없이 여러 가지 다른 맥락 속에 재배치하고 움직이며 재해석할수록 높이 평가받는다. 박물관은 위대한 죽은 것들의 무덤이어서 권위를 가지고, 미술관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살아 움직이게 함으로써 권위를 갖는다. 박물관은 역사고, 미술관은 오늘이다.



같으면서도 다른 박물관과 미술관을 한자리에 융합한 전시가 화제다. 서울 중구 세종대로에 있는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리고 있는 ‘DNA : 한국미술 어제와 오늘’전이다. 문화재와 근현대 미술품을 한자리에 모아 시공을 초월한 한국미(美)의 DNA를 추적하고 조명하기 위해 기획됐다.

전시는 동아시아 미학의 핵심이자 근현대 미술가들이 우리 전통의 핵심으로 인식한 네 가지 키워드로 ‘성(聖: 성스럽고 숭고하다)’, ‘아(雅: 맑고 바르며 우아하다)’, ‘속(俗: 대중적이고 통속적이다)’, ‘화(和: 조화로움으로 통일에 이르다)’를 꼽았다.

1부 ‘성’에서는 삼국 시대부터 고려 시대까지의 이상주의적 미감이 근대 이후 우리 미술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어떤 형태로 발현됐는지 보여주기 위해 고구려 고분벽화부터 통일신라 시대 석굴암, 고려청자, 이중섭으로 이어지는 미학의 맥을 짚는다.

2부 ‘아’에서는 해방 이후 화가들이 한국적 모더니즘을 추구하고 국제 미술계와 교류하며 한국미술의 정체성을 찾으려 했던 고군분투기가 담겼다. 겸재의 진경산수화, 추사의 문인화에서 ‘아’를 추구한 전통을 포착하고 달항아리, 1970년대 단색조 추상 열풍, 백색담론으로 이어진 이야기다.

3부 ‘속’에서는 조선시대 풍속화, 미인도, 민화의 미학을 이어받아 1980년대 민중미술과 강렬한 채색화로 이어져 흐르는 정신을 좇는다.

4부 ‘화’에서는 1990년대 이후 한국미에 대한 인식을 살피며 역동적으로 변모하는 사회 속에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를 존중하고 조화하는 미학을 줄기로 전통부터 현대까지의 시공을 꿰뚫는다.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한국 회화사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상징, 고구려 고분벽화 작품이 관람객을 맞는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인 ‘강서대묘 현무 모사도’다. 근대 거장 이응노는 생전 고구려 고분벽화를 민족성을 드러내는 작품으로 칭송했다고 한다. 그가 고구려 고분벽화 중 청룡백호도에 대해 남긴 대목이 특히 그렇다. 그는 “간소한 구도에서도 기상천하는 기백이며 칡넝쿨같이 마음껏 굵게 그은 선이며, 심후한 색감은 그 시대성을 상징하고도 남는다”며 “그 작품 하나로서 그 시대 우리 민족이 얼마나 의기양양하였다는 것은 역사를 통하여 우리는 증언할 수 있지 않은가”라고 했다.

김이순 홍익대 교수는 이번 전시를 계기로 작성한 글에서 “이응노뿐 아니라 당시 미술가들이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해 지녔던 인식, 전통으로 계승한 이유를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다”며 “이응노가 고구려 고분벽화 중에서 사신도에 주목한 것도 이를 통해 우리 민족의 기백과 강인한 민족성을 증언할 수 있으며, 이를 계기로 현실의 난관을 극복하고 세계 무대로 나아가는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강서대묘 현무 모사도 주변으로 배치된 이숙자의 ‘강서고분벽화 청룡도’, 권진규의 조각 ‘해신’, 박노수의 ‘수렵도’ 등이 근현대 미술품에 미친 영향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이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미적인 DNA로 남아있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전시 도입부터 강렬한 압도적 인상은 전시 내내 이어진다. 박물관에서 온 유물과 현대미술품들 가운데서도 명품 중의 명품으로 꾸며졌고, 전시장에서 작품들의 배치 방식은 전시기획 아이디어보다 더 파격적이고 대담하다.

가령 전시는 별도의 설명글을 최대한 줄여 관람객이 스스로 해석하도록 여지를 두고, 공간 기획으로 상상력을 자극한다. 벽면에 순서대로 늘어서 있는 작품을 관람하는 통상적인 방식이 아닌, 공간 한가운데 기둥에 작품들이 기둥을 둘러싸며 걸려있다. 기둥을 돌며 작품을 감상하게 함으로써 전혀 다른 시공의 작품이 연결돼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식이다.

또한 흔치 않은 세모꼴 좌대는 자칫 위태로워 보일 수 있는데도 세모꼴 좌대 위에 작품을 올려두는 방식이 활용됐다. 세모난 좌대가 만든 비스듬한 각도를 따라 작품 사이에 놓인 유리벽에는 다른 시공에서 만들어진 작품들이 서로를 비춘다. 관람객이 눈을 돌리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국보와 보물, 유수의 근현대 미술품들이 서로 겹쳐졌다 사라지고 하나가 됐다가 나뉜다. 그 순간을 포착할 때마다, 마치 작품의 영혼들이 움직이는 것 같은 느낌을 줘 비상한 감상 경험을 하게 된다.

가령 초기 달항아리 작품을 감상하다 고개를 들어 멀리 내다보면 그 뒤편에 놓인 현대 달항아리들이 이어져 보여 6개의 달항아리가 줄지어 서 있는 것처럼 착각을 일으키거나, 멀리 벽에 걸린 김환기의 달항아리 회화 작품까지 보여 진풍경을 연출하는 식이다. 모두가 제각각 최고의 예술품으로서 집중을 받아 마땅한데도, 관람객 눈에 들어오는 시각의 범위를 다른 작품들이 서로 침범하게 유도했다. 각 명품들을 연결하는 한국미의 DNA가 유유히 흐르고 있음을 은유하는 배치다.

삼각형 좌대 위에 서 있는 최종태의 ‘관음보살상’을 마주하고 서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오른편에 서 있는 권진규의 처절한 조각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보이는데, 두 작품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유리관 표면으로 두 작품의 그림자가 비치면서 묘한 광경이 펼쳐진다. 관음보살상이 십자가에 매달린 그리스도를 뒤에서 안고 서 있는 것과 같은 형상이 만들어져 소름이 돋는다.

‘분청사기 인화문 병’을 둘러싼 유리관 위로 뒤편에 걸린 김환기의 점화 ‘19-Ⅵ-71 #206’ 무늬가 드리워져 분청사기 인화문 병 표면의 무늬와 김환기 점화의 무늬가 겹칠 때, 두 작품이 500년 시대를 뛰어넘어 호응하고 있음이 전해진다.

개별 작품들만큼이나, 전시 전체가 주는 인상이 강렬하다. 미술 전시가 팽팽한 긴장감을 줄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워서다. 배원정 학예사가 “전시 준비과정에서 유리가 갑자기 깨지는 등 사고들도 발생해, ‘작품들의 기가 너무 세서인가’ 하는 말까지 나왔다”고 귀띔했다.

마지막 작품은 압권이다. 조덕현의 ‘오마주 2021-Ⅱ’다. 100년 전 과거 한국인들의 모습을 가로 830㎝, 높이 350㎝의 거대 화면에 연필로 그려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일제강점기 유리건판 자료를 활용해 함경도부터 제주도까지 전국 각지 다양한 인물을 지역별·성별·연령대별로 고르게 선별하고, 한국 미술사에 중요한 인물들과 예술가들의 얼굴을 사이사이 끼워넣어 모든 사람들이 한날한시에 모여있는 것처럼 그린 그림이다. 전시장 취재 중 배 학예사가 기자에게 “연필로 그린 것”이라고 하자, 옆에서 귀를 쫑긋 세우고 있던 관람객들이 “와”하고 동시에 탄성을 뱉었다. 전시장 벽을 꾸민 단순한 흑백사진인 줄 알았는데 일일이 연필로 그린 거대한 작품이라는 ‘반전’에 깜짝 놀란 것이다.

박물관의 문화재들이 미술관에 왔다는 점에서 과거로의 시간여행이 되고, 근현대 미술품이 문화재 곁에 놓인 풍경에서 미래로의 시간여행을 경험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관행적으로 출판되는 도록의 수준과 달리, 두고두고 펼쳐봐야 할 책이 만들어졌다. 전통부터 현대까지 한국 미술사 사전이라 할 만큼의 여러 주제에 대한 글을 학자 44명이 나누어 맡아 썼다. 도록은 650쪽에 달한다. 이번 전시에 동원된 작품과 자료는 국보와 보물이 35점, 이건희컬렉션 4점을 포함한 근현대 미술품 약 130점, 자료 약 80점이며, 전시에 등장하는 작가의 수는 97명에 달한다. 현대미술관에 더부살이하는 근대미술관 덕수궁이 비좁다. 10월 10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