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정현의 ‘흐름’을 담은 작품
정현은 1956년생으로 인천에서 태어났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다녔다. 이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파리 국립 고등 미술 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했다. 파리 팔레 루아얄 정원, 베이징 금일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김종영미술관, 금호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 소마미술관, 포항미술관, 후쿠오카 아시아 미술관 등의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국립현대미술관 2006년 올해의 작가, 김종영 미술관 오늘의 작가, 김세중 조각상 본상 등을 받았다.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각으로 다시 태어나는 일
정현은 이렇게 물성과 인간의 탐구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조각한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드러난 것은 보는 이에게 시각적, 정신적 감동을 전한다. 2016년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서 열린 ‘서 있는 사람’ 전시는 그 대표적인 예다. 작가는 한불 수교 130주년에 맞춰 파리의 팔레 루아얄에서 전시를 열었다. 루이 14세가 거주했던 이 장소는 현대미술을 전시하는 장소로 사용된다.
여기에 사람이 서 있다. 수많은 사람이 서 있다. 각자 모습은 다르지만 굳건한 태도는 같다. 자세히 보이지 않지만 주먹을 꽉 쥔 듯하다. 어떤 강력한 의지와 힘이 거기서 전해진다. 호위 무사처럼 선 이들의 주변에는 잘 다듬어진 나무들이 늘어졌다. 그 일렬의 나무를 따라가서 고개를 들면 화려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궁이다. 다시 한 번 고개를 들어 눈을 돌려보면 회랑이 장소를 포위하듯 감쌌다. 그런데도 사람은 굳건하게 서 있다. 여기에 사람이 서 있다. 수많은 사람이 서 있다.
정현은 팔레 루아얄 정원에서 침목으로 만든 50여점의 거대한 군상을 세웠다. 인상 깊은 점은 주변환경을 모두 제치고 정현의 작품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는 것이다. 서 있는 사람은 화려함의 극치인 프랑스의 궁도 풍성함을 자랑하는 칠엽수 나무도 모두 앞선다. 긴 시간을 거친 물건과 사람이 지닌 응축된 에너지의 위엄은 이토록 강하다.
침목 작업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정현의 또 다른 작품으로는 파쇄공 작업이 있다. 파쇄공은 무게가 수십 톤에 이르는 구(球) 형태의 쇳덩어리다. 제철소에서 자석으로 아주 높이 올렸다 떨어트리며 사용한다. 아래에 있던 쇠를 용광로에 넣을 크기로 깨트리기 위해서다. 정현은 2010년 포항제철소 내 고철 야적장을 방문했다가 이 쇳덩어리를 처음 봤다. 그것이 낙하는 장면을 목격하며 뼛속으로 스미는 강한 진동을 느꼈다.
둥그렇고 우람한 덩어리가 바닥에 놓여 있다. 바위처럼 보여 가까이 다가가 만져본다. 손에 차가움이 느껴지며 쇳덩어리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것을 가만히 다시 보고 서 있으면 상처들이 보인다. 둥글다고 생각했던 것은 눌린 듯 찌그러져 있다. 표면에는 무언가에 의해 찍히고 파인 흔적들이 있다. 파쇄공이다.
정현은 작업을 하며 재료에 지나친 변형을 가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재료가 가진 특성을 잃지 않도록 작업한다. 그것이 지나온 시간과 존재 자체에 존중하는 마음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작가는 폐기 철물이 품은 힘을 끌어내는 것에 주력한다. 본래 약 16t이었다가 약 8t까지 닳고 줄어든 파쇄공은 이렇게 우리 눈앞에 작품으로 다시 나타난다. 이제 파쇄공은 단순한 파쇄공이 아니라 성실한 노동과 인고에서 비롯한 깊이와 힘의 상징이다.
#콜타르와 철이 그리는 드로잉
정현은 작업을 하면서 일기를 쓰듯 지속하여 드로잉을 해왔다. 순간의 감정과 생각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도 전형적인 미술 재료가 아닌 콜타르 또는 철을 사용한다. 콜타르는 석탄을 고온으로 건류할 때 부산물로 생기는 검은색 유상 액체다. 콜타르로 그린 드로잉에서는 야성적이며 거친 느낌이 전해진다. 작가가 이미지의 형태가 아닌 재료의 존재감을 드러내려 한 결과다.
철 드로잉 또는 녹 드로잉에서는 이 의도가 더 강조된다. 철을 캔버스에 묻히고 이를 긁어낸 화면. 그 위에 물을 뿌려 녹을 아래로 흐르도록 유도한 작업이다. 작가와 재료가 조응을 이루며 완성한 이 작품에는 시간의 흐름과 일의 흔적이 있다. 작가는 과정을 지나간 것으로 치부하지 않고 결과로 보여주려는 바람을 이렇게 내보인다.
어느새 시월이고 올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오래 달려온 듯하지만 아직 도착선이 보이지 않는 지금, 당신이 가장 지친 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응축된 시간과 힘을 가진 때일 수도 있다. 정현이 조각과 드로잉을 통해 보여주었듯 말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두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것은 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을 일으켜 그 안의 가능성을 다시 가늠해볼 법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