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청이던 獨, 강국 만들고 유럽 분열 막아 사생활 보안으로 알지 못한 ‘인간 메르켈’ 주변 인물 백여명 인터뷰해 입체적 관찰 부시·오바마·푸틴 등과 각별한 신뢰관계 자유·과학 등 부동의 신념이 ‘롱런’ 비결
메르켈 리더십-합의에 이르는 힘/케이티 마튼/윤철희/모비딕북스/2만6000원
앙겔라 메르켈의 시대가 저물었다. 2005년 독일 역사상 첫 여성, 동독 출신 총리로 선출된 후 16년간 메르켈이 보여준 리더십은 경이롭다. 냉전 시대를 극복했지만, 통일이 만들어낸 무게에 휘청이던 독일을 다시 세계 강국 반열에 올려놓고 유럽의 분열을 막았다. 상상할 수 없던 일이 벌어지곤 했던 트럼프 시대에는 서방세계의 마지막 안전판이었다. ‘유럽의 닻’, ‘서구 자유주의의 마지막 수호자’가 그녀에게 바쳐진 영예다.
그토록 오랜 시간 세계 정치의 중심에 있었지만, 메르켈의 진짜 모습은 대체로 알려진 게 많지 않다. 워낙 사생활과 보안을 중시하며, 같이 일하는 동료들에게도 이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서방 유수 언론조차 메르켈 특유의 버릇이나 몸짓을 진지하게 분석하는 것으로나마 속내를 짐작하는 일이 벌어질 정도다.
신간 ‘메르켈 리더십-합의에 이르는 힘(THE CHANCELLOR : The Remarkable Odyssey of Angela Merkel)’은 자서전이 나오지 않는다면 메르켈에 대한 최고의 안내서이자 기록이 될 듯하다. 방대한 주변 인물 인터뷰 등을 통해 걸출한 정치인의 개성과 자질이 빚어진 동독 시절 성장기부터 지금까지 메르켈 행보를 입체적으로 적고 있다.
이는 저자와 메르켈의 특별한 신뢰로 가능했다. 미국 ABC뉴스 서독 특파원을 지낸 저자 케이티 마튼은 남편인 리처드 홀브룩 전 독일 주재 미국 대사를 통해 2001년부터 메르켈과 인연을 맺었다. 또 지난 4년간 총리 집무실에서 메르켈을 관찰했다. 이제까지 영문으로 번역되지 않았던 엄청난 분량의 독일 사료들과 인터뷰 자료도 이 책의 자양분이 됐다. 메르켈의 내면을 파악하기 위해 백수십 명을 만났다. 헨리 키신저, 힐러리 클린턴, 조지프 스티글리츠, 요아힘 가우크, 로저 코언, 폴커 슐렌도르프 등등.
그 결과 책을 읽노라면 메르켈의 일상과 그 주변 풍경, 사람들이 마치 눈앞인 것처럼 펼쳐진다. 이제는 관심사에서 벗어난 메르켈 특유의 패션에 얽힌 사연도 상세히 소개된다. 동독 출신 여성 정치인으로서 메르켈이 중앙 정치무대에서 활동을 시작했을 때 옷차림은 큰 스트레스거리였다. 그는 자신의 외모에 관심이 집중되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물자가 부족했던 동독에선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패션과는 거리가 먼 메르켈의 헤어스타일, 플랫 슈즈, 펑퍼짐한 코트 차림이 문제가 됐다. 콜조차 주변 여성 보좌관이나 자신의 부인에게 메르켈의 무신경한 패션을 어떻게 좀 해보라고 간청할 정도였다. 메르켈은 평판 좋은 양장점에서 무난한 옷들을 잔뜩 맞춰 옷장을 가득 채우고 매일 헤어 스타일리스트에게 머리 손질을 맡기는 것으로 대응했다.
저자의 상세한 관찰과 방대한 취재는 메르켈 리더십의 본질로 독자를 안내한다. 메르켈은 집무실로 향할 때 머릿속을 특정한 프로그램이나 구체적인 정책 대신 핵심적인 가치로 채웠다. 마음 깊이 간직한 신앙, ‘의무’와 ‘봉사’라는 확고부동한 신조, ‘독일은 유대인에게 영원한 빚을 졌다’는 믿음, 과학자 출신답게 증거를 기초로 정확하게 의사를 결정하는 성향, 자국민을 감금하는 독재자들을 향한 본능적인 혐오, 표현과 이동의 자유가 바로 ‘메르켈’을 이루는 가치다. 이를 국민이 따라올 수 있는 속도로 적용한 게 그의 장기 집권 비결이다.
가장 흥미진진한 대목은 역시 16년이란 긴 세월 동안 메르켈이 세계를 움직인 다른 지도자들과 만든 ‘라포(rapport·신뢰관계)’다. 부시, 오바마, 트럼프, 푸틴 등 강인한 개성을 지닌 외국 정상과 메르켈이 만든 특별한 ‘케미’를 읽다 보면 때로는 놀랍고 기이할 정도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경우 두 정상 모두 소탈한 성품이어서 첫 만남부터 절친이 될 수 있었다. 메르켈은 부시를 ‘진솔하다’고 평가했고, 두 사람의 깊은 신심도 공통점이 됐다. 두 정상의 특별한 ‘라포’는 이후 미국이 기후변화에 소극적인 태도를 바꾸는 데까지 영향을 미쳤다.
옛 소련 시절 모스크바를 방문했고 러시아어에도 능통한 메르켈과 KGB 요원으로 독일에 주재했던 푸틴 러시아 대통령 사이는 여러모로 독특하다. 두 정상은 자주 통화했는데 메르켈의 러시아어로 시작한 통화는 더 능통한 푸틴의 독일어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둘은 정반대 성향이었지만 그만큼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정기적으로 통화했는데 대화를 시작하면 첫 30분은 메르켈에게 푸틴이 서방세계에 품고 있는 여러 불만을 늘어놓는 식이었다. 이를 다 들어주고나서 메르켈은 “봐요, 블라디미르, 다른 나라들은 그 상황을 그렇게 보지 않아요. 그런 시각은 당신의 이익에 도움이 안 돼요”라고 말하곤 했다. 푸틴은 정상회담 시간에 늦는 식으로 골탕을 먹이거나 기선을 제압하려 했지만, 그런데도 두 정상은 서로를 존중하는 사이였다.
대다수가 남성인 정상들의 거친 외교 각축장에서 메르켈은 푸틴과 트럼프 등 권위주의 지도자들을 때론 어르고 한편 달래며 세계가 존중해야 할 룰과 가치를 지켜냈다. 메르켈과 가장 가까웠던 지도자는 버락 오바마였는데 첫인상은 별로였다. 메르켈에겐 “구체적으로 변변하게 이뤄낸 것도 없으면서 카리스마를 주체하지 못하는, 안달 난 젊은이”였다. 그럼에도 메르켈을 향한 오바마의 존경심은 갈수록 커졌고 마침내 2011년 대통령 자유훈장을 수여하기에 이른다. 당시 미셸 오바마는 메르켈에게 속삭였다. “있잖아요, 버락은 당신을 끔찍이 아껴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고조된 메르켈은 기자단에게 이 말을 전하면서 물었다고 한다. “미셸의 그 말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해요?” 우크라이나 전쟁 등 민감한 국제 이슈를 두고 밀고 당겼던 두 사람의 관계는 오바마 행정부가 메르켈의 개인 휴대폰을 도청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얼어붙기도 했다. 하지만 퇴임을 앞둔 베를린 방문에서 오바마는 선거에 다시 나설 것을 망설이는 메르켈에게 트럼프시대에 세계가 믿을 수 있는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출마를 권했다.